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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천냥 빚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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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논설위원

김승현 논설위원

빚 안 져 본 사람이 거의 없다. 평생 부동산과 씨름하는 서울살이엔 빚은 ‘또 하나의 가족’이다. 크고 작은 빚이, 마음의 빚까지 포함하면, 오만가지 이야기를 만든다. 빚을 대하는 태도는 인격을 비추는 창(窓)이 되기도 한다. 사례가 풍성하니 사람 보는 ‘통밥’이 통한다.

흔히 쓰는 속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그래서 매우 단편적(斷片的)이다. ‘채무자 관점’에 치우쳤다. ‘~천 냥 빚을 안 갚는다’가 맞는 말일 수 있다. 빚이 탕감된 이후 채무자는 “갚았다”고 생각하는데 채권자는 “안 받고 끝냈다”고 여길 수 있다. 창 너머로 떠오르는 친구와 친척, 선·후배가 있지 않은가.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최근 사업가 신혜선씨의 의혹 제기에 대응한 말을 보면 문득 빚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양 원장은 “(알아는 보겠다며 뭉개던) 그때 속으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았다면’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만냥을 기대했던 사람의 욕망을 채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신씨는 우리들병원 대출 특혜 의혹에 양 원장 등 친노·친문 인사가 연루된 의혹을 주장하고 있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종교계(천주교) 지원을 담당했다는 신씨는 문 대통령에게도 “가까운 이가 연관성이 있다면 그 문제가 잘 돼가는지 묻는 게 양심 아닌가”라며 “괘씸하다”는 표현을 썼다. 복잡한 내막은 수사 중이니 섣불리 단언해선 안 된다. 다만, 채권자 신씨가 양 원장 등을 향해 “우물쭈물 피하는 건 비굴한 답”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말 한마디 빚 탕감’은 실패한 셈이다. 2년간 정치권을 떠나 있을 때 양 원장은 “(대선 때 도운 이들에게) 부채를 갚을 길이 없어 정치적 ‘파산신청’을 했다”고 이유를 댔는데, 복귀하면서 ‘나 홀로 빚잔치’라도 했는지 궁금하다.

김승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