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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블라인드 채용’ 금 갈까봐? 원자력연 엉뚱한 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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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최준호 과학&미래팀장

최준호 과학&미래팀장

‘아랫것’은 서럽다. 특히 권위주의가 팽배한 조직이나 사회 안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 11일 ‘원자력연구원이, 정부 지침에 따라 블라인드 채용을 했다가 한국말이 유창한 중국인이 뽑혀 고민 중’이라는 기사를 썼다. 취재 당시만 해도 ‘중국인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며 블라인드 채용 폐해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던 원자력연구원이 하루 만에 돌변했다. ‘설명자료’를 내고는 블라인드 채용 때문에 중국인이 뽑힌 건 아니라며 본지 기사를 반박했다. 외국인 채용을 금지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해당 중국인의 경우도 범죄경력과 같은 신원조회 관련 서류가 미비했기 때문에 채용이 보류된 것이라고 적극 해명했다.

하지만, 연구원은 개원 60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인이 최종 선발까지 올라온 이유는 설명하지 못했다. ‘설명자료’만 보면, 중국인 지원자가 범죄경력만 없으면 채용될 듯하다. 과연 그럴까. 설명자료에는 없지만, 사실은 보안심사까지 할 예정이라고 한다. 채용 부서의 과제가 국가 기밀사항 유출과 관련이 있는지를 보겠다는 말이다. 이 중국인이 과연 원자력연구원 최초의 외국인(중국인) 정규직 연구원이 될 수 있을까.

원자력연구원이 왜 이럴까. 누가 봐도 블라인드 채용의 폐해 때문인 걸 알 수 있는데. 연구원은 이날 소관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청와대에 시달려야 했다. 평등을 우선가치로 내세우는 현 정부의 인사방침인 블라인드 채용을 흠집 냈기 때문이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블라인드 채용은 문제가 없다. 연구원이 채용 규정을 너무 경직되게 적용한 잘못”이라고 화살을 돌렸다. 12일에도 설명자료를 내고 ‘과기출연연은 채용 때 이름·주소·연락처는 물론 연구수행 관련 정보를 충분히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원자력연구원 채용 심사위원들은 국적은 물론 이름·주소도 모르는 상태에서 깜깜이 채용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원자력연구원은 블라인드 채용이 아니더라도 서럽다. 탈원전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전강국’의 연구원들은 졸지에 찬밥신세가 됐다. 주 52시간제의 전격 실시로 몰래 밤늦게 연구하는 ‘도둑연구’란 말까지 유행한다. 비정규직 연구원을 정규직으로 바꾸면서 그만큼 우수연구자를 뽑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원자력연구원을 퇴임한 한 원로는 기자에게 “연구원은 협동조합이 아니다”면서도 “지금은 공식적으로 이견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권위적 분위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준호 과학&미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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