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간의 괴물 상상, 선하지 않은 세상 설명하기 위한 것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64호 17면

김대식의 ‘미래 Big Questions’ <7> 괴물은

인류 최초 대도시였다는 수메르의 ‘우룩(Uruk)’. 우룩 최고의 왕이자 영웅 길가메시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특히 ‘길가메시와 훔바바’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에게 가장 인기였다. 나무가 없는 메마른 땅 수메르. 신전 건설에 필요한 삼목을 구하기 위해 길가메시와 친구 엔키두는 서쪽 (아마도 오늘날 레바논?) 먼 나라에 있다는 풍성한 삼목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삼목산을 지키는 괴물 훔바바 때문이었다.

인류 최초 대도시인 수메르 ‘우룩’ #그곳 신이었던 훔바바는 괴물로 #영웅 vs 괴물 싸움은 선·악의 대결 #낮엔 선량한 선생님·변호사·공무원 … #밤엔 핏빛 게임 즐기는 이중생활도 #괴물이 죽어야 다시 정의로운 세상?

고대 메소포타미아 괴물 훔바바. [대영박물관]

고대 메소포타미아 괴물 훔바바. [대영박물관]

사실 훔바바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훔반(Humban)이라는 이름의 엘람 지역 최고의 신이었던 그는 수메르인들로부터 후와와(Huwawa) 또는 훔바바(Humbaba)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어느덧 수메르 신들에 복종해 삼목산을 지키는 가디언으로 추락해 버렸다. 삼목을 베어가려는 길마메시와 신들이 사는 삼목산을 지켜야만 했던 훔바바. 길가메시·엔키두와의 싸움에서 진 훔바바는 참수당하고, “사자 같이” 용맹한 얼굴을 가졌다는 초기 수메르 기록과는 달리 추후 바빌로니아인들은 훔바바의 얼굴을 마치 꼬인 내장으로 만들어진 흉악한 괴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페르세우스가 참수한 그리스로마 신화의 메두사, 보물을 강탈하려는 지그프리드와 싸우다 살해당한 게르만 신화에서의 용 파프니르(Fafnir), 고대 영국 베오울프 서사기에서 베오울프에게 죽움을 당하는 그렌델(Grendel)… 신이었던 훔바바는 괴물이 되었고, 인간의 욕망을 가로막다 결국 살해당하는 수많은 괴물의 원조가 된 셈이다.

보쉬 ‘쾌락의 정원’ 속 탐욕은 지옥선 고통

히에로니무스 보쉬 ‘쾌락의 정원’(1490~1510). [사진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히에로니무스 보쉬 ‘쾌락의 정원’(1490~1510). [사진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왜 인간은 괴물을 상상하기 시작한 것일까? 단순히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과 절망을 상징하는 걸까? 아니면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에서 같이 세상에서 탐욕과 쾌락은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끝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아무리 현실이 두렵고 힘겨워도 결국 승리하고 성공할 것이라는 카르타지스가 필요했던 걸까?

영웅과 괴물의 싸움은 동시에 선과 악의 대결이기도 하다. 매일 먹고살 걱정을 하며 인생 대부분이 절망과 패배로 가득한 대부분 수메르인, 고대 그리스인, 로마인, 중세기인, 그리고 2019년 한국인에게 영웅은 우리가 영원히 될 수는 없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괴물은 우리가 아닌,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듯한 ‘그들’이다. 수메르의 훔바바, 고대 그리스의 메두사, 게르만의 그렌델과 파프니르, 그리고 중세기 유럽의 집시와 유대인. ‘우리’와 ‘그들’의 싸움은 어느새 ‘선과 악’의 싸움이 된 것이다.

최근 독일 주간 신문 ‘디 자이트(Die Zeit)’는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던졌다. 역사적 가장 낮은 범죄율을 자랑하는 평화롭고 안전한 선진국에서 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범죄와 살인 장면으로 가득한 영화와 방송을 즐기는 걸까? 한 편에 적어도 여러 명, 그리고 단순한 살인이 아닌, 잔인한 폭력과 고문 장면이 포함될수록 시청률이 치솟는다. 개인에게 자유와 계몽을 부여하겠다며 시작된 인터넷은 폭력과 거짓의 천국이 되었고, 낮에 열심히 일하던 선생님, 학생, 변호사, 공무원이 밤 만되면 타인을 암살하고 좀비를 참수하는 컴퓨터 게임에 몰두한다. 현실에서 사라져가는 폭력과 악을 드라마와 게임에서 되찾으려는 듯한 인간. 우리는 ‘악’ 없이는 살 수 없는 걸까?

세상은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무의미하고 정의롭지 않다.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더구나 이렇게도 힘겨운 인생을 살겠다고 우리는 동의한 적도 없고, 그 누구도 우리에게 설명해준 적도 없다. 어디 그뿐만일까? 죽도록 공부하고 일해 이제 겨우 살만하면 우리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 이유 없이 태어나 다시 이유 없이 죽어야 하는 인간. 도대체 무슨 이렇게 황당하고 재미없는 게임이 다 있을까? 우리만의 질문은 아닐 것이다. 고대 수메르인들 역시 똑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고, 그들의 질문은 길가메시와 훔바바의 이야기를 탄생시킨다.

카라바조 ‘메두사의 머리’(1597). [사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카라바조 ‘메두사의 머리’(1597). [사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길가메시 서사기는 적어도 두 개의 버전으로 존재한다. 초기 수메르어(기원전 ~2100년) 버전은 “모든 왕을 능가하는….”(shutur eli sharri…)으로 시작하지만, 오늘날 표준으로 불리는 아카디아어·바빌로니아어 버전(기원전 ~1200년)은 “깊은 곳을 본 이…” (sha naqba imuri…)로 시작한다. 초기 수메르어 버전이 비교적 단순한 길가메시라는 영웅의 전설을 이야기한다면 후기 바빌로니아어 버전은 조금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는 듯하다. 도대체 무슨 ‘깊은 곳’을 길가메시가 봤다는 걸까? 영생을 얻기 위해 세상을 떠돌던 길가메시는 세상 끝 주막에서 술의 여신 ‘시두리(Siduri)’를 만난다. 괴물 훔바바와 하늘의 황소 ‘구가라나(Gugalanna)’를 살해한 대가로 죽어야 했던 친구 엔키두를 슬퍼하며 자신은 절대 죽고 싶지 않다는 길가메시에게 시두리는 말해준다. “언젠가 죽어야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연적인 인간의 조건이라고.” 그냥 고향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고,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귀여운 아기가 크는 모습을 보며 살면 된다고. 길가메시 서사시 표준 버전이 완성된 지 1200년 지나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말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 그러니까 오늘 하루를 즐기라는 조언이겠다.

길가메시 서사시 수메르어 버전은 시두리의 조언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대부분 전문가는 추측한다. 그런데 뭔가 찜찜하긴 하다. 신의 피와 진흙을 섞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수메르의 신들은 왜 인간에게는 영생을 허용하지 않은 걸까? 메소포타미아 독자들 역시 궁금해했던 걸까? 바빌로니아 표준 버전에서는 우트나피시팀(Utnapishtim)의 이야기가 추가된다. 신들의 노예로 만들어진 인간은 뜻밖에도 너무나 빨리 번식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리고 인간은 시끄러웠다. 떠들고 노래하고, 울고 웃고, 다투고 화해하는 인간. 너무나도 시끄러워진 인간을 제거하기 위해 신들은 대홍수를 일으킨다. 우트나피시팀은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인류와 동물을 구하고, 노여움이 풀린 신들은 그에게 보상으로 영생을 부여한다. 그리고 하나의 약속을 한다. ‘다시는 인류를 멸종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담보로 인간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영생을 우트나피시팀에게만 부여한다고.’

좀비와 싸우고 연쇄살인마 좇는 우리들

그렇다. 신들과 인간과의 약속을 표시하는 것이 우트나피시팀의 영생이기에, 누구나 영생을 얻게 된다면, 인간과 신들 간의 약속 역시 무효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개인의 영생이 바로 인류의 멸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 길가메시가 얻은 교훈이고, 그 교훈을 얻기 위해 훔바바는 괴물이 되어 죽어야만 했다.

괴물과 악 역시 세상의 질서에 필연적인 존재라는 가설은 추후 독일 작가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에서도 소개된다. ‘철학과, 법학과, 의학, 그리고 불행히도 종교학까지 전공했다’는 파우스트 박사 (다행히 뇌과학은 전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를 악의 길로 유혹하려던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는 결국 자신의 계획마저도 태초 때부터 정해진 신의 질서 안에 이미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좌절한다.

선하지 않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괴물을 상상해냈고, 영웅과 괴물의 싸움은 선과 악의 존재적 투쟁이 됐다. 괴물의 죽음은 세상이 언젠가 다시 정의로워질 수 있다는 신의 약속을 상징하기에, 우리는 오늘 저녁 또다시 방송과 인터넷에서 좀비와 싸우고 연쇄 살인마를 찾아다닐 것이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