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한반도 비핵화 지원을”…왕이, 미국 겨냥 “강권정치 국제위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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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문재인 대통령은 5일 “지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구축을 위한 프로세스가 중요한 기로를 맞이하게 됐다”며 “핵 없고 평화로운 한반도라는 새로운 한반도 시대가 열릴 때까지 중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왕이, 정·재계 60명과 오찬에선 #“더 높은 수준 한·중 협력” 요구

문 대통령은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동안 중국 왕이(王毅)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여정에 중국 정부가 아주 긍정적인 역할과 기여를 해주고 계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이 중국 우호적인 원론적 언급에 가까웠다면, 왕 부장은 직설적이었다. 왕 부장은 “현재 국제정세는 일방주의, 그리고 강권정치의 위협을 받고 있다. 중·한 양국은 이웃으로서 제때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다자주의, 자유무역을 같이 수호하고 기본적인 국제 규칙을 잘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의 대통령 앞에서 미국을 비판한 것이다.

전날 강경화 장관을 만났을 때 “냉전 사고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졌고, 패권주의 행위는 인심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의 연장선이다.

왕 부장은 또 이달 말 중국에서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담을 언급하며 “다음 단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번 달로 예정된 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잘 준비해 중·한 관계 발전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중·한·일 3자 간 협력도 잘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왕 부장의 발언에서 묻어나듯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은 거칠어지고 있다.

동맹국 미국과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는데, 지금은 방위비 분담금 문제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상태다. 북·미 회담은 진도가 나가기는커녕 양국이 무력을 운운하며 갈등이 커지고 있다.

일본과는 대화를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지소미아와 수출규제 문제가 여전히 첨예하게 맞물려 있고, 중국과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문제의 앙금이 남아 있는 데다 미·중 갈등 속에 끼여 운신의 폭도 좁아졌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하명수사’와 ‘감찰 무마’ 의혹이라는 내환(內患)에 한반도를 둘러싼 심상찮은 외우(外憂)까지 겹친 상태다. 임기가 꺾이자마자 풀어야 할 의혹과 해내야 할 과제들이 밀려드는 모양새다.

왕 부장은 이날 낮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정·재계와 학계 인사 등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오찬회 연설에서도 ‘미국 때리기’를 계속했다. 왕 위원은 “중국의 발전을 억제하려는 이들의 의도는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라며 “모든 사람이 중국의 성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왕 부장은 한국을 끌어당기려는 의도도 숨기지 않았다. “100년 전 두 나라는 국가를 멸망으로부터 구하고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는 애국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중국의 5·4 운동, 한국의 3·1운동과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이라며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통분모를 강조했다.

그는 “이번에 한국에 온 것은 중요한 전략적 소통을 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세 가지 희망사항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상호 신뢰관계 구축 ▶더 높은 수준의 (양자)협력의 실현 ▶더 높은 수준의 다자 협력 등이었다. 그러면서 왕 부장은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과 한국의 신남방 정책 간 연계 강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조속한 서명 추진 등을 예로 들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견제와 직결되는 이슈들이다.

유지혜·권호·이유정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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