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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내 딸 좀 찾아주세요" 30년 애끓은 백발 아빠의 오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화성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는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가 열린 23일 오전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효찰대본산 화성 용주사 관음전. 11명의 이름이 적힌 위폐 앞에 선 노(老)부부는 무표정으로 앞만 응시했다. 크게 한숨을 쉬고 질끈 눈을 감기도 했지만 의연했다.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열린 '화성살인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에서 이춘재가 살해한 것으로 확인된 '화성 실종 초등생' 유가족이 위령재를 지켜보고 있다.[연합뉴스]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열린 '화성살인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에서 이춘재가 살해한 것으로 확인된 '화성 실종 초등생' 유가족이 위령재를 지켜보고 있다.[연합뉴스]

"왜 자식에게 절해야 하느냐" 노부부의 눈물 

하지만 영혼을 영단에 모시고 천도의식을 고하는 '대령' 의식이 시작되자 부부의 눈빛이 흔들렸다. 피해자들을 위해 마련된 제단에 절을 한 아버지 김모(68)씨는 두 걸음을 못 가 주저앉았다.
"내가 왜 자식에게 절을 해야 해."
애끓는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법당 안에 울려 퍼졌다. 경찰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걸음을 뗀 어머니도 그 옆에서 소리 없이 흐느꼈다.

이들 노부부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입건된 이춘재(56)의 범행으로 희생된 A양(당시 만 8세)의 부모다. A양은 1988년 7월 7일 학교에서 귀가하던 중 실종됐다.
8차 화성 살인 사건 발생한 지 10개월 뒤에 발생한 일이라 당시 A양의 실종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A양의 실종을 단순 가출 신고로 보고 수사했다.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화성살인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가 봉행되고 있다.[연합뉴스]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화성살인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가 봉행되고 있다.[연합뉴스]

5개월 뒤 인근 야산에서 A양의 치마와 책가방, 속옷 등 유류품 10여점이 발견됐다. 국과수 감정 결과 유류품 3점에서 혈액 반응이 나왔지만, 혈액형 등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증거물은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1년 정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연장선에서 A양 실종 사건을 지켜봤지만 이후 '가출인'으로 최종 처리했다.

막내딸의 실종에 가족들은 가슴앓이해야 했다. 화성 땅이 보기도 싫다며 이사도 했다. 30년 만에 맞닥뜨린 막내딸의 소식은 충격이었다. 이춘재의 범행이라고 했다.
"A양을 살해한 뒤 시신과 유류품을 범행 현장 인근에 방치했다"는 이춘재의 진술에 따라 경찰은 지난 1~9일 시신이 유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수색하기도 했다. A양 가족들은 수색 기간 현장을 찾아서 지켜봤다. 하지만 A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유가족 "부실 수사 경찰관들도 처벌해 달라" 요구도

이날 위령재는 피해자의 영혼을 법당으로 모셔오는 '시련' 의식으로 시작해 영혼을 영단에 모시고 천도의식을 고하는 '대령' 의식, 고혼을 깨끗이 씻고 정화하는 '관욕' 의식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피해 영령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용주사 본말사 주지 스님들이 천도 염불을 집전하고 용주사 주지 성법스님의 추도사, 헌화 등도 이어졌다.

오후에도 살풀이, 영혼을 극락왕생시키기 위해 천도재를 올릴 때 법식을 베풀고 경전을 읽어주는 '시식', 초청된 영혼을 돌려보내는 '봉송' 의식이 계속됐다.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신도들이 화성연쇄살인 피해자를 위한 합동위령재를 봉행하고 있다. [뉴스1]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신도들이 화성연쇄살인 피해자를 위한 합동위령재를 봉행하고 있다. [뉴스1]

위령재가 진행되는 동안 A양 가족들의 얼굴에선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아버지 김씨는 위령재에서 마주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 연쇄살인 사건 전담수사본부 관계자의 손을 꼭 붙잡고선 "제발 내 딸 좀 찾아달라"며 오열했다.
김씨는 추도사를 마친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에게도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들더니 "경찰을 믿고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는데 감춰서 속에 병이 났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하소연했다.
그는 "사람이 사는 게 아니다. 시신을 꼭 찾아달라"면서도 "과거 부실수사를 한 경찰관들을 처벌해 달라"고 요구했다.

배 청장 "사건 진실 명명백백하게 확인하겠다"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열린 '화성살인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에서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이 추도사를 마친 후 이춘재가 살해한 것으로 확인된 '화성 실종 초등생'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연합뉴스]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열린 '화성살인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에서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이 추도사를 마친 후 이춘재가 살해한 것으로 확인된 '화성 실종 초등생'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연합뉴스]

배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은 추도사에서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존재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많은 희생이 발생한 것에 대해 깊은 사과와 함께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며 "희생자들의 원혼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유가족들이 짊어지셨을 무거운 마음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정확히 확인하여 알려드리는 것이 우리 경찰의 책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사본부에서 모든 사건을 원점에서 검토하고 철저히 수사해 진실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라도 고인들이 편안히 눈 감으실 수 있도록 사건의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확인하고, 당시 수사 과정에 과오가 있었다면 그 역시 사실대로 숨김없이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용주사 주지 성법스님도 "한 맺힌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재를 마련했다"며 "억울하게 희생된 고혼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다시는 이런 끔찍한 사건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화성=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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