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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박홍 신부가 말한 인간의 중심가치

중앙일보

입력

박홍 신부가 9일 78세로 세상을 떴다. 그는 생전 많은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중심 가치'를 말한 영성 신학자이기도 했다. 2009년 1월 3일 자 중앙SUNDAY 인터뷰는 영성 신학자 박홍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2008년 박홍 신부. [중앙포토]

2008년 박홍 신부. [중앙포토]

박홍 신부는 서강대 총장(1989~97년)과 이사장(2003~2008년)을 역임했다. 교육행정가 이미지가 강하다. 그는 가끔 정치적 발언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본인은 자신이 보수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박 신부는 ‘대표적 보수 논객’이라는 언론이 부여한 타이틀도 갖고 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영성 신학자다. 박 신부는 65년 가톨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예수회에 입회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대(석사)와 로마교황청 그레고리안대(박사)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했다.

박 신부는 94년 서강대 총장으로 재직할 때 “주사파의 배후는 북한”이란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그는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며 ‘예’와 ‘아니요’가 명확하다. 박 신부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배격한다. 그는 거짓과 진리, 밤과 낮, 악령과 성령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보며 이러한 차이를 “두루뭉술하게 뭉개고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배격한다.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박 신부는 다만 가톨릭 신자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를 취했을 뿐이다. 성서의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오 5:37)

언론매체가 박 신부를 다룰 때 그의 신앙은 그저 ‘양념’과 같은 배경으로 등장할 뿐이다. 영성 신학자인 박 신부의 신앙과 지혜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 2008년 12월 30일 그를 인터뷰한 것은 그런 영감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문 중에서 중앙일보가 가장 객관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언론매체는 ‘벽 없는 교실’이라며 신문이 이 시대의 교육적 소임을 다해 주기를 당부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비참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한 손으로는 만들고 다른 손으로는 부수는 모순적 존재입니다. 평화를 외치면서 항상 전쟁합니다. 인간은 축적된 경험의 덩어리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가르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함께할 때,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잘 행사할 때 인간은 위대해집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죄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인간은 비참하게 됩니다.”

-인간이 축적된 경험의 덩어리라는 것은 무슨 뜻이지요.

“인간은 시간·공간·사건에서 안팎으로 온갖 도전을 경험합니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내적·외적 가치충돌을 겪습니다. 특히 이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숙명적으로 세계화·민주화·남북통일이라는 3중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3중 도전의 과정은 인간과 자연, 국가와 국가, 권리와 책임, 노동과 자본,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등 각종 영역과 개체 사이에 새로운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인간은 생각과 도구를 활용하는 존재이면서 도전·갈등·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황하는 ‘나그네 인간(Homo viator)’의 면모도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은 가치 불확실성 시대, 문화충돌 시대에서 정체성 위기를 부담으로 껴안고 살고 있습니다.”

-불확실성 시대, 문화충돌 시대는 어디서 비롯됩니까.

“현대인이 ‘중심가치’를 무시하거나 없애려 하기 때문에 그런 시대가 나타납니다.”

-중심가치란 무엇입니까.

“중심가치는 생명·공동선·공존·연대성, 책임 있는 자유, 정의와 사랑 등으로 구성됩니다. 특히 생명가치에 대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성을 심각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반생명적, 역생명적 현상이 두드러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공동선의 가치는 특히 우리 정치문화에서 취약한 부분입니다. 공동선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어야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가 극복됩니다. 중심가치는 우리가 실천을 안 하고, 또 못 하고 있지만 확실히 존재합니다. 중심가치는 가치 충돌을 극복하는 확실한 지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여러 중심가치를 무시하고 오로지 경제적, 물질적 이익만을 절대가치로 삼을 때 모든 것이 물화(物化)됩니다. 욕심만 남게 됩니다. 물질가치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물질가치가 다른 중심가치를 대체할 때 퇴폐·향락·저질 문화가 판치고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자기밖에 모르게 됩니다. 물질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으로 세계나 국가 차원에서는 금융위기 같은 것이 발생합니다. 인간은 이미 물화됐으며 앞으로 더욱 물화될지 모릅니다.
그 결과는 전쟁입니다.”

-중심가치는 그리스도교와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봐도 됩니까.

“중심가치는 복음의 가치뿐만 아니라 불교의 가치, 샤머니즘의 가치와도 통합니다. 나쁜 놈이 되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있습니까?”

-중심가치를 현대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중심가치를 내면화할 때 이 가치들은 정신적·영적 항체가 되어 우리에게 불확실성 시대, 문화충돌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중심가치가 필요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없어지듯이 중심가치가 있으면 가치 혼돈 상황이 소멸합니다.”

-중심가치는 후세에 어떻게 전달됩니까.

“부모의 재산과 같은 물질가치나 기술가치는 쉽게 전달됩니다. 중심가치가 전달되기 위해서는 가정과 학교와 국가가 제구실을 다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행동을 보고 자녀들이 감동받았을 때 중심가치가 전달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중심가치를 받아들이고 실천할 능력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그러한 사람이 됩니다. 절·성당·예배당에서 기도하는 분들은 부처님·예수님을 닮아 갑니다.”

-인간의 바람만으로 충분합니까.

“영감(Inspiration)도 필요합니다. 좋은 영감은 좋은 생각을 낳고, 좋은 생각은 좋은 행동을, 좋은 행동은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반면 악령에서 나오는 나쁜 영감은 결국 자살·거짓말·사기와 같은 나쁜 행동을 낳습니다. 표현 방식은 문화나 언어에 따라 다르지만, 영(靈)에는 인령(人靈), 악령(惡靈), 성령(聖靈)이 있습니다. 인령은 사람의 영이고,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죠. 악령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중심가치를 내재화할 때 어떤 좋은 결과가 있습니까.

“대표적인 좋은 결과로는 화해와 치유가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가 화해하고, 마음과 머리가 화해하며, 과학기술가치와 생명가치, 자본과 노동이 화해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느님 혹은 인간과 부처님이 화해하며 인간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상처 입은 조개가 진주가 되듯이 상처 입은 인간이나 상처 입은 관계도 화해와 치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실패하면서 배우는 존재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것을 깨닫고 이미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심가치가 세계의 가치체계에서 중심으로 서는 데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한국 문화에는 물질가치와 정신가치를 통합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자신의 한(限)을 ‘썩음’이 아니라 배추나 무가 김치가 되듯이 ‘삭임’으로 초월합니다. 한국은 인류학자도 인정하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종교박물관입니다. 신앙과 기도의 전통도 강합니다. 기도에는 감사·찬미·청원의 기도 등이 있는데 우리는 ‘하소연 기도(prayer of lamentation)’를 참 잘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중심가치의 회복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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