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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고기거부’ 공론화…군대도 채식 식단 준비해야하나

중앙일보

입력

취사병의 모습(왼쪽) [중앙포토]

취사병의 모습(왼쪽) [중앙포토]

“80년대 후반에 군대에 갔는데, 그땐 채식주의라는 말도 없었어요. 관련 책이나 인터넷도 없었으니까. 그런 말 자체를 주변에서 이해 못 했지요. 이단 종교 취급당하기도 하고…"

1일 서울 신촌의 한 채식 카페에서 만난 이원복 한국채식연합대표는 30년 전 군대생활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군대에서 고기 섞인 반찬은 덜고, 채소만 골라 먹었다고 한다.

이마저도 힘들면 밥에 고추장만 비벼 먹었다. 젓갈·액젓이 들어간 김치는 못 먹었다.

이원복씨는 20대부터 채식했다. 그는 군대도 채식권리를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태호 기자

이원복씨는 20대부터 채식했다. 그는 군대도 채식권리를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태호 기자

군대 선임들은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러냐, (고기를) 먹으라면 먹는 거지, 네 생각이 뭐가 중요하냐"며 이씨를 때리고 왕따 시켰다. 배불리 못 먹어서 몸무게도 5~7kg 줄었다.

“고기는 동물 사체”…채식인구 10년 새 10배 늘어 

이씨는 완전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이다. 육류·달걀·유제품 등을 아예 안 먹는다.

이 밖에 고기는 안 먹고, 생선·조개·달걀은 먹는 ‘페스코(pesco)’, 고기·생선은 안 먹고 우유·달걀·유제품은 먹는 ‘락토오보(lacto-ovo)’, 달걀은 안 먹고 우유만 먹는 '락토(lacto)'등의 유형도 있다.

“지금도 고기는 동물 사체라고 생각해요.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어요”

군대에서 채식을 포기할 생각은 안 했느냐고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채식은 취미·기호가 아닌 신념·철학 문제라서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이씨는 지금도 주변에 채식을 강요하거나, 육식을 비판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한국채식비건협회 등에 따르면 국내 채식인구는 지난해 약 100만 명쯤이었다. 10년 사이 10배쯤 늘었다. 이씨같은 비건은 약 50만명으로 추정했다. 채식전문 음식점도 국내 약 350개쯤 된다. 온라인 동호회·카페도 많다.

채식주의자용 햄버거. 비건은 동물성 식재료나 동물 실험을 거친 성분을 사용한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가장 엄격한 채식 단계다.[뉴스1]

채식주의자용 햄버거. 비건은 동물성 식재료나 동물 실험을 거친 성분을 사용한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가장 엄격한 채식 단계다.[뉴스1]

‘군대가 채식 보장 안 하는 건 양심 자유와 건강권 침해’ 

채식인구가 늘며 군대도 채식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내년 입대를 앞둔 정태현씨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군대가 채식권을 보장하지 않는 건 ‘양심의 자유’와 ‘건강권’침해’라는 내용으로 이달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낸다.

정씨는 “(군대 내 채식주의자들은) 음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무력감과 스트레스가 크다”고 말했다. 정씨 진정을 돕는 장서연 공익인권법재단 변호사는 “인권위가 (정씨의) 진정을 받아들이면 국방부는 어떤 내용이든 답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2012년 인권위는 채식요구 권리를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봤다. 당시 인권위는 “채식주의 신념이 확고한 수용자에 한하여 합리적 식단 배려를 할 것을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인권위는 당시 결정문에서 채식 식단 보장과 관련해 “비용부담이 높거나 행정력 낭비가 크다고 볼 정도가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채식 식단의 한 사례 [중앙포토]

채식 식단의 한 사례 [중앙포토]

정태현씨에 따르면 이미 군대에서 채식을 제공해주는 나라가 있다고 한다. 미군이 그렇다. 캐나다는 2000년대 초, 이스라엘은 2017년부터 군대에서 채식(비건)메뉴를 제공하고 있고, 리투아니아도 군대 내 채식제공을 의무화했다는 게 정씨 설명이다.

이밖에 미국 유타·캘리포니아주 내 병원·감옥·요양시설은 수용자에게 채식을 준다는 내용도 정씨 측이 인권위에 낼 진정에 들어있었다. 포르투갈은 병원·감옥·학교와 모든 공공건물에서 동물성 제품을 안 쓴 식품도 제공해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채식권은 기본권…병역거부는 논의 더 필요”

채식권 침해가 양심적 병역거부 사유가 된다는 주장도 있다. 앞서 이씨도 “지금 만약 입대를 앞두고 있다면 병역거부도 주장해봤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씨 역시 “식사선택권 박탈이 추후 병역거부 논의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구속된 경험이 있는 백종건 변호사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는 채식 등 장병들의 식품선택권을 보장하고 있어서 우리나라도 이런 권리를 보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채식을 허용하면 군대에 갈 수 있다’는 주장은 ‘전쟁반대’ ‘집총거부’ 같은 전통적 의미의 양심적 병역거부권 주장에 해당하지 않아 관련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채식권 침해가 양심적 병역거부 이유로 논의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면서도 “채식주의자에게 육식을 강요하는 건 ‘형벌’이고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공론화가 필요하지만, 국가가 기본권을 넓게 해석해 군대도 언젠가는 채식권 보장 논의를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태호 기자 kim.ta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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