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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중퇴했는데 진술서엔 한자어···화성8차 강압수사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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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부실 수사였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돼 옥고를 치른 윤모(52)씨의 신체적 특징 등과 맞지 않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면서 "고문 등 가혹 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윤씨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을 복역한 뒤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윤모(52) 씨가 지난달 30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참고인 조사를 위해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을 복역한 뒤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윤모(52) 씨가 지난달 30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참고인 조사를 위해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3일 윤씨 측 등에 따르면 8차 화성 살인 사건으로 조사를 받을 당시 윤씨는 여러 차례에 걸쳐 경찰 조사를 받았고 자필 진술 조서를 썼다. 이 중 3차례에 걸쳐 작성된 10장의 진술서가 일부 언론에 공개됐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조서 내용을 보면 윤씨는 경찰에 검거(1989년 7월 25일)된 다음날(26일) 2차례, 그다음 날(27일) 한 차례 조서를 작성했다.

윤씨 조서에서 발견된 '한자어' 

윤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그래서인지 조서엔 '밤(밥)도 먹씁이다(먹습니다)', '그렌데(그런데)', '손발 딱고(닦고)' 등 틀린 맞춤법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 수상한 용어가 발견됐다. '피해자', '이상은 사실', '서성거리며', '주거지', '후문 방향' 등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가 아니다.

7월 26일 작성된 한 조서는 '~했습니다'라고 썼다가 '~했다'로 바뀌는 등 들쑥날쑥했다. "누군가 불러준 내용을 그대로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윤씨 측은 보고 있다.

윤씨의 재심을 돕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조서 중에는 윤씨의 글씨체와 다른 글씨로 적힌 자술서도 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이날 자신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당시 윤씨의 진술서를 보면 '한글을 쓰고 읽는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며 "진술서 작성과정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경찰이 사건 관련 정보를 불러주거나 보여줘 탄생한 증거라는 사실은 진술서의 형식·문구·내용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썼다.

다리가 불편한 윤씨가 150㎝ 이상 담은 넘었다? 

8차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난 피해자의 집. [중앙포토]

8차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난 피해자의 집. [중앙포토]

윤씨는 과거 담을 넘어 피해자의 집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7월 26일 윤씨가 작성한 조사엔 "동네 놀이터를 거쳐서 피해자 집 쪽으로 내려와 담으로 넘어갔다. (중략) 창호지에 손을 넣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맨발로 책장을 넘고 들어가 잠자는 피해자를 상대로 범행한 뒤 옷을 다시 입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나왔다. 슬리퍼를 양손에 들고 뛰어가다 중간에 쓰레기장에서 (당시 입었던) 속옷을 불에 태웠다"고 돼 있다.

27일 작성한 조서엔 담 넘는 과정을 자세하게 적혔다. "담을 넘을 때 먼저 손을 잡고(손으로 잡고) 발을 먼저 올려놓고, 다음 한쪽 손을(손으로) 담을 잡고 한쪽 손으로 왼쪽 발을 올렸다. 두 발을 다 올린 다음 담 반대 부분으로 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윤씨가 넘었다고 쓴 담은 150㎝ 이상인 조립식 콘크리트 담이다. 윤씨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다.

책상의 운동화 추정 자국, 윤씨는 슬리퍼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본부가 차려진 화성경찰서 태안지서 [중앙포토]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본부가 차려진 화성경찰서 태안지서 [중앙포토]

당시 피해자의 방문 앞에는 책꽂이가 올려진 책상이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윤씨가 책꽂이를 넘어 방 안으로 침입했다는 게 당시 수사 내용이었다.

과거 유가족들은 "책상 위에 운동화처럼 보이는 발자국이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윤씨는 '슬리퍼를 신고 맨발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고 진술서에 썼다. 현장 검증 사진엔 발이 아닌 책상을 두 손으로 짚고 힘겹게 책꽂이를 넘어 방 안으로 들어가는 윤씨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 수사 기록엔 피해자의 집에서 5개의 음모와 5개의 머리카락이 발견됐다고 적혔다. 경찰은 이를 조사해 B형 남성을 용의자로 봤다.

그리고 음모의 형태와 방사성 동위원소 조사를 통해 윤씨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당시 국과수는 "동일인이 아닐 가능성은 3600만분의 1"이라고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방사성 동위원소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비슷한 환경이나 지역에서 일한 사람이라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범행 현장에서 나온 체모가 동일인의 것인지도 과거 수사에선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도 과거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경찰관들은 "가혹 수사는 없었고 국과수의 조사 결과에 따라 윤씨를 용의자로 특정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 모든 가능성을 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윤씨 측은 이달 중순쯤 수원지법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4일에는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을 찾아 법최면 수사 등을 받을 예정이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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