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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반갑잖은 만인의 연인 ‘지연’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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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호 31면

남승률 경제산업 에디터

남승률 경제산업 에디터

‘지연씨와 사랑에 빠졌어요.’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이 한창인 요즘 야구 온라인 카페 게시판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제목이다. ‘얼굴은 못 봤지만 하루 종일 만났다’ ‘벌써 며칠 째 만나는데 이제 그만 만나고 싶다’ 등의 내용도 수두룩하다. 지연씨가 누구길래 다들 난리법석일까. 문제의 지연씨는 프로야구 예매일에 티켓 예매 사이트에 접속하면 쉽게 만날 수 있다. ‘현재 접속인원이 많아 예매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접속 지연 안내문에 나오는 ‘지연’씨가 문제의 주인공이다. 프로야구가 아니더라도 다른 스포츠 종목이나 인기 아이돌그룹 공연 예매 때도 흔히 접할 수 있다. 반갑지 않은 ‘만인의 연인’이다.

인기 경기·공연 티켓 구하기 어려워 #실효성 있는 암표 근절·단속 기대

많은 사람이 지연씨만 바라보며 하염 없이 새로고침 버튼을 누른 경험이 있을 듯싶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연씨가 사라지며 예매창이 열리지만 이미 좌석은 동이 난 후일 때가 허다하다. 온 가족이 PC방에서 일전을 치르기도 하지만 역사상 어느 전쟁보다 치열한 ‘예매전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현장 예매창구 앞을 기웃거리면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 “OO표 있어요.” 암표상이다. 티켓 판매창구 바로 앞이나 옆에서 버젓이 암표를 판다. 주변을 서성이는 단속 요원은 마치 암표상 경호 요원 같다. ‘암표상을 철저히 단속하겠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현실에서는 딴판이다.

온라인 암표상은 한술 더 뜬다. 중고OO이나 티켓OO 등의 사이트에서 ‘암표’는 부르는 게 값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온라인에서의 티켓 거래는 현행법상 불법도 아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경기 직전까지 거래를 질질 끌며 온라인 암표상을 골탕 먹였다는 무용담도 떠돌지만 표를 구하고 싶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다. 집에서보다 접속 속도가 조금이라도 빠를까 싶어 온 가족을 PC방에 보내 봐야 로그인부터 좌석 선택, 결제창에 도달하기까지의 경로를 자동으로 처리해 주는 매크로 프로그램(Macro Program)을 돌리는 전문가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거상의 나라 중국은 배포부터 다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7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불법 조직들이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의 보안체계를 뚫고 경기 티켓 30만장을 사들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남자 축구 결승전의 좌석을 중국인에게 정가의 10배 수준인 60만엔(약 669만원)에 팔았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잦자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 측은 올림픽 티켓을 재판매할 경우 벌금 100만엔(약 1084만원)과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기로 했다.

스포츠 행사나 축제 등이 많을 계절에 국정감사도 겹쳐서일까. 국내에서도 암표 판매를 막을 대책이 줄을 잇고 있다. 원유철 자유한국당 의원은 9일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티켓을 산 후 이를 정가보다 고가에 되파는 행위를 막는 이른바 ‘매크로금지법’을 대표발의 했다. 비슷한 내용의 공연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에 여럿 계류 중이지만 티켓을 고가에 되팔아 발생한 부당 이득을 몰수·추징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튿날인 10일에는 경찰청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온라인 불법 저작물 유통, 암표 온라인 판매 등 주요 범죄의 예방과 근절을 위한 업무 협약’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인기 스포츠 경기, 공연, 행사에서 매크로 프로그램을 활용한 대량 티켓 구매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될 경우 현장 모니터링 정보를 경찰청에 제공하고, 경찰청은 적극 수사하기로 했다.

국회가 ‘조국 정국’에 묻혀 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단속은 제대로 할까. 지연씨는 물론 암표상도 여전히 만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남승률 경제산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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