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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전경련 패싱, 옹졸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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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지난 3월 청와대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 환영 만찬. 참석자를 일일이 호명하는 국빈 만찬 의전에 따라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 소개됐다. 그 순간 문재인 대통령이 앉아 있는 헤드 테이블 쪽에서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고 한다. ‘정경유착 적폐’의 대명사인 전경련이 초청받은 사실을 청와대 핵심들이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경위 조사가 벌어졌다. 결론은 청와대와 외교부의 ‘사인 미스’. 외교부가 한·벨기에 비즈니스 포럼의 파트너인 전경련을 ‘당연히’(혹은 눈치 없이) 초청 대상에 올렸고, 이를 청와대 담당자가 걸러내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경련 패싱(배제)’이 끝난 것 아니냐는 관측에 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기업과 소통에서 전경련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선을 그었다.

임기 절반 지나도록 ‘왕따’ 계속 #친기업 행보 진정성까지 의심 #경제마저도 네편 내편 갈라서야

정부 임기가 반환점을 돌고 있지만, 청와대의 전경련 파문(破門)은 풀릴 기미가 없다. 신년 인사회는 물론 대통령 해외 순방 때마다 빠진다. 지난 4일 경제단체장과의 만남에서도 전경련 자리는 없었다. 최근 여당 의원들이 전경련을 찾았다가 다음날 노동계에 사과했다. 전경련을 금기어로 여기는 청와대 기류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청와대는 전경련의 정체성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 전경련은 현 정부 출범 후 과거와 단절하겠다는 혁신안을 발표했다. 정경유착 창구라는 비난을 듣던 사회공헌 업무는 아예 없앴다. 재벌들 사랑방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한국기업연합회’로 바꾸고, 의사결정 기구도 회장단 회의에서 경영 이사회로 전환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청와대 생각인 듯하다. 그러나 전경련은 전경련대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체명 변경과 경영 이사회 설치는 정관 변경 사항인데, 주무 부처인 산업부의 장관 교체 및 인사이동 등으로 협의가 늦어졌다는 해명이다.

전경련의 변신과 실천은 더 두고 봐야 한다. 미진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민간단체에 대한 ‘왕따’를 계속한다면 정권의 포용력이 의심받게 된다. 전경련은 나름대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4대 그룹 등이 탈퇴하면서 인력은 반으로, 예산은 그 이하로 줄었다. 남은 직원의 급여도 30% 이상 깎였다. 이런 진통을 ‘위장’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그럴 바엔 차라리 “바라는 것은 전경련 해체”라고 말하는 편이 솔직하다.

경제를 살리자면서 60년 가까이 재계를 대표해온 단체를 외면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한·일 경제 갈등 해소 역할이다. 전경련은 1983년부터 일본 게이단렌(經團連)과 한·일 재계 회의를 열어 왔다. 일본 정부의 보복 조짐을 먼저 감지하고 경고음을 낸 것도 이런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전경련이 일본 경제보복 대책 회의에조차 초청받지 못한 것은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일이다.

게이단렌도 정경유착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민당 정권이 무너질 때마다 개혁과 변신의 목소리가 나왔다. 전임 민주당 정부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아베 재집권 초기 긴장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재계와 정부의 가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법인세율 인하, 미래 먹거리 선정 등 국정 현안에서 파트너로 대접받고 있다. 물론 정치자금 통로 역할이 강한 게이단렌이 우리 경제단체의 모델이 될 순 없다. 그러나 정부와 재계가 이인삼각을 이뤄 같이 뛰는 모습이 부러운 건 사실이다.

경제 실정론을 의식해서일까. 기업에 다가서는 여권의 손길이 조금 살가워진 듯도 하다. 그러나 재계는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친(親)기업 제스처가 위장 아니냐는 의심은 여전하다. 대기업 이익단체로서 전경련이 표방하는 가치는 어쩌면 현 정권의 그것과 대척점에 있다. 정부 듣기 싫은 목소리도 자주 낸다. 이런 대척점까지 껴안지 못한다면 기업의 긴장과 의심을 풀기 어렵다. 네편 내편 가르기는 정치로 족하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