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는 사실상 우리땅"|본사·대륙연주관「대륙연구강좌」손보기 교수 강연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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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앙일보가 대륙연구소 및 대한상의와 공동 주관하는 제1회 대륙연구 강좌가 지난 7일 대한상의 대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된 손보기 박사의「대륙에서의 한국사 전개과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역사는 대륙의 역사다.
한겨레는 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만주·시베리아·몽고·동북중국에서 살았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유전인자의 분석에서 한겨레는 만주지역에 사는 중국인·만주인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고 그리 머지 않은 옛날에 같은 조상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만주의 강가에 세워진 가장 두드러진 나라였다. 대륙을 중심으로 자랐던 이 나라를 이어받은 나라들은 차츰 기후조건이 좋고 산물이 더 풍성한 남쪽 압록강 너머로 내려와 나라를 이어가게 되었다. 압록강 북쪽에서 대륙을 바탕으로 살게된 고구려는 땅을 넓히고 동북중국의 터전을 차지하지만 중국의 저항에 부닥치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륙에서의 역사를 이룩하는데 굳센 힘을 휘둘렀다.
중국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노력은 고구려·백제·신라에 있어서 큰 줄기를 이루였으나 3국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려는 겨레의식을 가다듬어 나갔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백제를 아우른 다음 고구려의 옛 땅에는 발해가 따로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의 뒤를 이어 중국과 맞섰다.
신라가 동경에 주저앉아 대륙을 경계하면서 나라안에서 힘을 기르던 사이에 발해가 옛 땅의 우리 겨레를 묶어 신라의 안전을 도와주고 만주에서의 터전을 지킨 것은 대륙에서의 한국사전개에 큰 구실을 한 것이다.
고려는 신라를 이어받고 발해를 아울러 고구려의 뜻을 살리며 대륙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가졌다. 고려는 잃어버린 북쪽 땅을 찾겠다는 뜻을 버리지 않았으며 거란 및 여진과의 싸움을 겪었다.
조선에 들어서는 대륙으로의 발전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으며, 6진4군에 대한 관심은 여진족의 침입에 대한 반응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앞선 1590년에 누르하치는 백두산 아래에 고구려 땅인 압록강가를 차지하면서 여러 여진마을을 치고 힘을 모아 후금이라는 정권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이 간도일대를 조상이 일어난 당이라 하여 성스러운 당으로 삼고 이곳에서 조선과 중국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했다.
간도로의 조선사람 이주를 막은 까닭은 그곳을 청의 신성한 영토로 간직하자는 뜻과 청을 뒤에서 치지 않게 하려는 뜻이 들어있었다. 즉 조선사람의 힘을 두려워했고 조선사람이 오랫동안 지냈던 터전에서 관계를 끊게 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고있는 사람들을 내쫓기는 어려웠다.
1650년대의 한뭍에서의 청과 러시아의 싸움에서 조선 사람들은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데 기여했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사람들은 기후는 춥지만 기름진 땅을 찾아 간도지방으로 옮겨가 사는 사람이 늘어났다. 조선사람이 한뭍의 옛 땅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쉬워졌던 것은 청이 중국본토로 들어가면서 성지엄금을 차츰 누그러뜨렸기 때문이다.
청의 강희제 때 국경측정에 관심을 보이면서 조선과 해묵은 성지, 대금문제가 다시 일어났다.
국경선이 정해지면서 한뭍에서 밀려나는 결과가 되었다. 조선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옛 땅에 들어가 인삼을 캐고 농사를 지었다. 경계를 넘어가는 사람을 죄인으로 다루었으나 실학자들은 영토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연구를 폈다.
1870∼80년대에는 청이 본격적으로 간도에 진출하려 했으나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간도는 실질적으로 우리 영토가 되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조선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항일의병의 간도·연해주 진출이 본격화되고 이 지역은 항일 무장싸움의 터전이 되었다.
한뭍은 우리 한겨레의 고향이고 몇 십만 년 전부터 우리의 조상이 살았던 곳이었다. 때로는 겨레의 주된 갈래가 살았고 문화를 이룩했으며 그곳에서 다른 갈래와 어울리고 싸우기도 했다.
또 어려운 경제여건 때면 그곳의 넓은 곳을 찾았다. 우리에게 언제나 고향이 되었던 한뭍은 앞으로 우리의 손길과 기술이 필요한 처녀지가 될 수 있는 곳이다.(손현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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