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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맹운동의 탈 이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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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소 냉전기류가 공존으로 방향을 틀고 소련·동구권에서 공산주의 이념이 퇴조하고 있는 현상은 드디어 비동맹운동에까지 큰 변화를 몰고 왔다.
8일 베오그라드에서 폐막된 비동맹 정상회담의 선언문은 지금까지 제3세계국가들의 모임이 거의 관례적으로 주장해온 반제국주의, 반 서방 비난을 자제하고 이들이 당면한 거대한 부채와 공해문제 등 경제실용주의를 핵심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미소강대국으로부터의 「비동맹」을 존재이유로 삼고 활동해온 이 운동이 미소간에 평화공존의 확대로 일종의「정체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비동맹」이지만 실제로는 반미·반 서방 성향을 강하게 띠어온 이 제3세계 국가 연대는 소련이 미국과 서방의 기술과 자본을 기대하면서 공존을 추구하게 되자 비동맹을 주장할 대상인 강대국의 동맹체제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 이들 남쪽 국가들은 강대국에 대한 반제국주의로 표현되어 온 이념적 지향성보다는 발등에 떨어진 경제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자국의 경제를 살리고 시대의 흐름에 뒤지지 않게 해줄 절박한 선택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선택을 다른 나라도 아닌 공산 유고슬라비아가 주도했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비동맹 운동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서방국가들의 식민지로 수탈 당했던 제3세계 나라들이 이 치욕적 과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회주의 편향성의 움직임 이였다. 그러나 이번 회의의 분위기는 이들이 이제 사회주의에 기댈 심리적·물질적 유혹을 떨쳐버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비동맹 권의 이 같은 변화는 2차 대전이래 세계를 갈등·대결의 구도로 나누었던 동서냉전과 남북 간의 불화가 다같이 공존협력의 새 질서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길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시각에서 이번 비동맹정상회담의 선언을 환영한다.
61년 첫 비동맹 정상회담이 이 기구를 창설했을 때 주도적 역할을 했던 티토, 네루, 나세르, 수카르노, 엥크루마 등 제3세계 신생국 지도자들은 서방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난 약소국가들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줬었다.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등 강대국의 정치 경제체제가 아닌 제3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다는 자립·자주의 철학은 모든 신생국 국민들에게 현란한 미래에의 꿈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은 머지 않아 환멸로 되돌아섰다. 이상은 빵을 생산해주지는 못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독자적으로 국가건설을 추진하다 보니 혁명 지도자들은 대부분 독재자로 표변했으며 혁명가가 신생국의 행정 지도자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검증해줬다.
그 결과 제3세계는 거의 예외 없이 자기들이 그토록 탈피하려했던 강대국 의존에 더욱 얽매이게 되고 감당할 수 없는 서방 외채의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이번 비동맹 정상회담이 보인 수정노선은 그와 같은 과거에 대한 반생의 결과다. 그것은 산업과 자본이 전 세계를 무대로 움직이고 있는 지구화 현상에 적응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아직도 이런 시대흐름을 거부하고 있는 북한도 이번 비동맹 회담의 분위기에서 교훈을 얻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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