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는 살아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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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시민사회를 지키는 깨어있는 시민의 연대와 사회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물론 소극적인 표현이다. 시민사회를 위협하거나 파괴시키고 침묵시키려는 힘이 안팎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분명히 인식할 점은 1987년 6월 항쟁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획득한 사회부문, 또는 조직을 국가권력이 다시 통제해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의 경각심 절실>
나는 이 점에 대해 특히 언론이 보다 경각심을 가져주기를 진정으로 요구하고 싶다.
국가권력의 와해를 겨냥하는 레닌주의를 경계하는 것에 못지 않게 공안정국의 여세를 몰아 취약하게나마 움터왔던 시민사회의 자율공간을 국가권력이 다시 통제 하에 두려는 치밀한 작전을 경계하는 것이 보다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공안정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의 확대는 한 마디로 시민사회의 자율성에 절대적 한계를 씌우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공안」에 관계되는 한 신체의 자유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의 기본권도,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가치도, 자유로운 언론·집회·사상도 모두 유보되거나 국가권력에 종속되어야 함을 위압적으로 선포하고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시민사회를 국가권력에 순치 시키려는 시도가 오늘날 다시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그 정체가 지극히 의심스러운 폭력테러가 빈번해지는 현상이다. 최근 울산·울주 전교조지회 사무실과 마산·창원 노련사무실에 침입하여 쇠파이프·망치·못 박힌 각목 등으로 교사와 노동자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한 괴한들의 행동은 계산된 공포심으로 목표집단들의 활동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적인 테러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체제수호」를 앞세우고 있는 우익집단들의 행태가 자칫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파괴시키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구시대 문화의 유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공안에 관련된 지명수배자를 잡는 일이라 하더라도 군 수사기관이 대학생과 같은 민간인의 수사에 개입하는 것은 법적으로 보나 사회발전의 추세로 보나 도저히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가장 강력한 관료적 통제가 미쳤던 민간부문, 예컨대 교육제도에서 발견된다.
사회발전의 시각에서 보자면 교육은 이제 정부의 독점물로부터 벗어나 자율화외 길을 걸어야 할 때가되었다.
자율화란 획일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또 자율화를 위해서는 교육의 일선을 담당하는 교사들이 교육의 내용과 방법 및 교육행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집합적 의사를 개진하는 제도화된 통로를 가져야 하며 이 참여의 통로를 열려면 그들이 민주적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자명한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비록 전술상 다소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교육민주화의 큰 물꼬를 트려는 의지로 교사들의 참여운동을 비판적으로 성원해주었다면 전교조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신장시키는 귀중한 모범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교육에 대한 관료적 통제가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나는 역행하는 이 시대의 흐름에 주목하면서 국가권력의 통제와 획일성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시민사회의 영역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민주화도 어렵고, 깨어있는 시민으로서의 자긍심도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의 비대화 경계>
시민사회는 규격화된 코드가 지배하는 사회일 수 없으며 많은 차이와 더불어, 또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존하는 다양성의 사회다. 만일 국가권력이 그들의 눈에 벗어난 다양성, 그들에 순치 되지 않은 차이를 백안시하고 이를 제도적·물리적 방법으로 격파시키려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그토록 극복하려 노력해온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위험이 근래의 문교행정에서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전 교조의 해체 및 탄압방식에서부터 「동국대 사건」 또는 이른바 「사학비리」에 대한 문교부의 감사행정의 선택성에서 우리는 권력의 진정한 의도를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이처럼 현재의 상황은 권력의 부단한 자기확대로 특징된다.
또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토지공개념의 입법화를 적극 선언하고 나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의와 필요성을 적극 지지하면서도 이것의 정치적 함의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국가권력의 비대화와 국가지상주의 적 사고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함정을 피해 가는 길 역시 광범위한 시민운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정부는 그동안 민주화다, 7·7선언이다 하여 좋은 말들은 많이 했으나 정치력의 빈곤으로 별다른 결실을 얻지 못하던 차에 이번에는 토지공개념으로 사회개혁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알맹이는 대부분 빠지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것이 명실상부한 개혁이 되도록 하려면 무엇보다 정부와 국회에 민의를 투입시키는 강력하고 광범한 시민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기회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고 할 때, 만일 우리가 이 기회에 국가권력에 종속되지 않은 채 정부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사회운동의 능력을 결집시킬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공존을 보장하는 민주사회의 건설에 새로운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

<국가권력 지도해야>
결론적으로 우리의 과제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소극적으로는 국가권력의 무절제한 팽창과 소수 특권계층의 이기주의로부터 시민사회의 질서와 공존을 지키는 문제이고, 적극적으로는 시민사회의 다양성과 공개성에 입각하여 사회의 자율적 역량으로 국가권력을 지도해가고 특권계층의 이익을 사회정의에 종속시키는 보다 큰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극우 건 극좌 건간에, 또는 파시즘이건 레닌주의적 혁명이건 간에 거대한 국가관료 주의에로 흐르는 양극의 흐름과 판별하여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자율성과 다원성을 회생시키는 사회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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