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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오가던 도문대교에도 분단의 아픔이…(연변 기행취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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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만주라 불렸던 중국 동북지방에는 우리의 전통과 습관을 비교적 잘 유지하며 살아가는 1백80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족이 있다. 중국 국적의 이들 한인후예들은 지리적으로는 북한과 잇대어 있지만 최근 확대되고 있는 한중교류에 따라 한국과의 협력을 희망하고 있다. 본사 양영훈·박병석특파원이 중국 최대의 한글일간지 연변일보와의 업무 교환 협정체결을 계기로 연변일보의 협조아래 우리 조상들의 한과 뜻이 서린 용정·도문등을 돌아보았다.

<윤동주 묘소>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묘소를 찾기 위해 시내 외곽의 야산공동묘지로 향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시인의 무덤은 황량한 야산 공동묘지 한족에 쓸쓸히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수백기의 무덤중에서는 그중, 눈에 띄었다.
한문으로 돼있는 비문은 『봄바람이 무정하여 꽃은 피였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쓰러졌으니 애석하다』고 적고 있다.
윤시인의 무덤은 85년동안이나 공동묘지의 잡초속에 묻혀져 있다가 85년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봤던 일본인 오무라 (대촌익부)교수 일행에 의해 발견된 아픔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윤동주 문학사상 연구회와 윤동주시인 기금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그의 뜻을 기리는 사업들이 펼쳐지고 있다.
연변대 민족연구소 박창욱교수(62)는 일본은 1909년 용정에 간도총영사관을 세우는등 동북지방 침략기지로 삼았으나 조선인들에게는 반일기지인 동시에 문화중심 도시로서 1919년 3월13일 대규모 독립 시위를 벌였다고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용정중학은 많은 인재를 배출해낸 민족학교였다.
용정중학은 원래 은진중학(기독교), 동흥중학(천도교), 명신여중(기독교), 영신중학(일명 광명중·기독교), 대성중학(유교), 광명여중(기독교)등 6개 종교학교를 바탕으로 46년에 통합된 것이라고 유기천전교장(59·동창회장)이 설명한다.
- 기념사업 펼쳐
이 학교에는 옛 대성중의 2층 벽돌 교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지금은 학교역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전시관에는 옛 교사 사진과 교가 및 윤동주시인을 비롯한 졸업생들의 사진등이 비교적 잘 보관돼 있다.
용정중학은 많은 인재를 배출해냈는데 그중 정일권 전국무총리는 36년 광명중을, 북한 부주석 이종옥은 39년 동흥중을 졸업했는데 유전교장은 이들의 학적부를 우리 일행에게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둘러본 용정의 옛 일본영사관건물은 용정시 인민정부와 시당본부로 사용되고 있었고 현재시장과 당서기는 모두 조선족이였다.
옛 일본영사관 뜰에는 『인민을 위해 봉사하자』는 공산당 구호가 적힌 대형팻말이 시대의 변천을 대비시켜주고 있었다.

<한·만국경>
한·만국경엔 또 하나의 분단이 있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중국을 잇는 도문대교(북한명 남양대교)는 한반도의 남쪽에서 홍콩과 배경을 돌아온 우리 일행에게 남북분단의 아픔을 다시금 일깨우는 현장이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주도 연길에서 군데군데 초가마을이 보이는 산길을 돌아 북동쪽으로 약50km쯤 달리면 분단의 다리에 도착한다.
함경북도 남양시와 마주한 인구 6만명의 도문시는 예부터 한중양국을 잇는 관문중의 하나였으며 약1백년전부터는 가난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통하는 도시였다.
다리 저편, 북한땅에는 망루처럼 보이느 흰색 6층 건물등 높은 건물들이 몇채 보이지만 사람의 움직임은 찾아볼수 없고 침묵속에 잠겨있다.
- 증기기관차 운행
맞은편 산에 「속도전」이라고 쓴 흰색의 대형글씨가 북한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했으나 증기기관차가 하얀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산천의 모습이다.
안내차 동행한 길림성 도문시 해외연락회 회장 유건위씨(51)는 평균하루에 3백명, 1년에 약10만명이 이 다리를 통과해 중국과 북한을 왕래 한다고 한다.
「중조변경」이란 빨간 글씨의 사진촬영용 팻말을 옆으로 기념사진을 찍은후 마침 내리는 비바람을 피하러 다리 옆의 조그마한 정자로 들어서자 중년 부부가 「조선말」로 『남조선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연길에 사는 조국삼씨(42·은행인) 용금순씨(여·37)부부는 일행을 반기며 자기들은 어젯밤 북한 함흥에 사는 매부가 이 다리를 통해 오늘 도문에 온다는 전화를 받고 여러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 황토빛 두만강
이들 부부는 5년전 용씨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직전 누더기가 다된 족보를 어루만지며 「남조선」 어딘가에 살고 있을 큰아버지 용근순씨(80)를 꼭 찾으라는 유언에 따라 여러 갈래로 줄을 놓아 올 3월 강원도 홍천에 살고 있음을 확인, 편지를 주고받고 있으며 머지않아 남쪽 땅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일행은 「두만강 푸른물」이 아닌 「도문강 탁한물」에 실망을 느끼며 일단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중국명인 도문에서는 두만강이라 부르지 않고 도문강이라 부르며 강물도 황토색이 짙은 탁한 물에 강폭도 겨우 20∼30m밖에 되지 않았다.
- 양국이념 연결
선착장에서 도문대교 바로 밑을 돌아 2km를 왕래하는 「도문강유람선」도 있었다. 배를 타고 돌아보다가 도문대교 난간 중간에서 가로등의 크기와 모습이 상이한 것을 목격했다.
이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을 가름한 것이며 도문대교 상류에 있는 철교중간에서도 페인트 색깔을 달리해 국경선을 표시한다는 설명이다.
통통선인 도무강 유람선에서 손을 뻗어 적셔본 두만강 물은 제법 싸늘 했어서 다소 실망하는 표정을 보였더니 동행했던 연변일보의 임장춘부장은 북한의 무산철광 폐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람선 선착장에는 『유람객은 반드시 중·조 두나라의 변경협의와 우의를 반전시키기위해 노력하여야한다』고 시작되는 「통고」게시판이 있었는데 한글·중문아래 영문으로 적혀있었다.
41년11월 준공된 도문대교는 가난과 핍박으로 얽힌 우리동포들의 한많은 사연이 담겨있는 다리다. 그러나 지금은 개혁·개방을 추구하는 중국식 사회주의와「자주」라는 이름아래 개방을 망설이는 북한사회주의를 연결하는 다리인 셈이다.

<동포들의 생활>
간도 이민의 중심지이자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용정은 도시전체가 항일의 역사였으나 인걸은 간데 없고 선구자들의 숨결만 들리는듯 했다.
용정은 연변조선족자치주주부 연길에서 7백ha나 되는 사과·배 농장용 끼고 남쪽으로 40여분좀 달리면 탁트인 들판이 눈에 들어오고 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을 안고 있다.
- 선구자 노래 고향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이라고 동행한 조선족 원로 김승옥씨(60·연변조선족자치구해외연의회고문)등이 설명한다.
그러나 도도히 흐를 것으로 예상했던 해란강은 폐수를 담고 흐르는 좁고 얕은 하천이었다.
일송정·용주사등 『선구자』에 나오는 「뜻깊은」곳들의 위치를 물었으나 김승옥·오태호(전연변일보사장) 씨등 조선족 원로들은 옛 선구자의 흔적들은 자취가 없어졌거나 폐허 화했다고 설명했다.
오씨는 남한에서 오는 사람들이 거의 예외없이 일송정을 찾아 올해 비암산에 새로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고 해 일행은 새「일송」을 찾았다.
해란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오면 「용두레 우물」이 있다. 우물 앞에는 「룡정지명기원지우물」, 뒤엔 「용정지명기원정천」이라고 쓴 비석이 있고, 그 옆에는 『이 우물은 1879년부터 1880년간에 조선시민 장언석·박인언이 발견하였다. 이들은 우물가에 「용두레」를 세웠는데 룡정지명은 여기서 나왔다』로 시작하는 안내문이 있다.
이 우물터는 시멘트를 바르고 주위에 사슬을 둘렀으며 우물은 철제뚜껑을 덮어 놓았으나 이 우물을 배경으로 이용하는 사진사가 있어 그런대로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김희자씨(36·연변일보사무처근무)는 자신은 물론 주위에서도 전형적인 보통 가정으로 꼽는 사람이었다.
-색TV가 재산
김씨의 「애인동무」(연변에서는 부부를 서로 이렇게 불렀으며 도문에서는 남편을 나그네라고도 불렀다) 한정수씨(37)는 국영 연변자동차운수공사 인사과장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 부부의 「공자」(월급)는 각종 보너스와 보조금을 합해 월평균 한씨가 1백60원(한화 약2만9천원), 김씨가 1백60원(한화 약2만5천원)이다.
부부의 월평균공자 합계가 3백원(5만4천원)이면 연길에서는 보통 수준이지만 연변자치주 전체로는 중상급에 속한다.
방 3개짜리 김씨네 연립주택에는 색TV(컬러TV)·전기세탁기·사진기·녹음기·옷장등이 주요 재산목록이다.
김씨는 작년 11월에야 2천8백원(약50만4천원)을 주고 색TV를 살 수 있었는데 이는 이들 부부월급의 9개월분에 해당된다.
조선족들은 색TV 다음에는 2천원(약36만원)쯤하는 일제 냉장고(1백80ℓ)를 사는 것이 희망이지만 김씨네는 『넣어둘 것이 별로 없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냉장고 대신 국민학교 1학년생인 무남독녀 미연양(7)을 위해 무려 6천원(1백8만원)쯤하는 프랑스제 고급 피아노를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김씨의 외출복은 시집온 혼수를 포함해 60원(1만8백원)~2백원(3만6천원)하는 한복 4벌과 스웨터 3벌이지만 무용반인 딸 미연양에게만은 월간 식비로 자신의 공자 3분의1이 넘는 50원을 쓰고 있다.
- 수수한 차림새
김씨는 화장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화장품비도 들지 않고 부부가 모두 자전거로 통근하는 까닭에 교통비도 들지 않는다. 시부모를 모시고 있어 다섯식구의 식비로 한달1백원(1만8천원)을 쓰는 것외에 경조사에 목돈을 쓰고 있다.
휴일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공원에 놀러가거나 5각(90원)쯤하는 영화나 연극으로 소일하지만 친형제등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에는 1백∼2백원, 직장동료들의 결혼식에는 20∼30원의 축의금이 보통이란다.
김씨는 서울에 친족방문을 다녀온 이웃이 가져온 한국의 여성잡지를 보고 서울 여자들의 차림과 아름다움에 깜짝 놀랐다고 실토한다.
이들 보통 조선족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라 한국과의 경제합작등 교류확대를 희망하고 있으나 남북한이 한 민족으로서 더욱 가까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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