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집착 말고 시장 존중 리더십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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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추락하는 성장 동력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바닥으로 치닫는 서민과 영세 자영업자의 체감경기를 되살리는 해법을 가시적으로 내놔야 할 입장이다. 꼬여 가고 있는 부동산 시장 안정 대책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기업의 발목을 붙들어 매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나 수도권 규제 등의 손질도 새 경제팀이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다.

할 일은 산더미지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노무현 대통령의 잔여 임기가 끝나는 1년7개월가량이 전부다.

권 부총리는 기존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공언했다. '노무현 코드'를 계속 살려가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제부총리가 바뀐 이후에도 정부와 시장의 갈등이 계속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권 부총리가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들을 전문가들에게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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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드보다 일자리가 최우선"=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체감경기가 악화하고 있는 것은 일자리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신규 취업자가 35만~4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했다가 이 숫자를 최근 35만 명으로 줄인 상태다. 그만큼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분배를 중시하는 정책이 성장률을 낮게 만들고 그 결과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새 경제팀은 분배 중시라는 노무현 정부의 코드보다는 성장을 유지해 일자리를 늘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비와 투자 심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과감하게 규제를 풀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히 현 정부가 후반기 중점 과제로 내세운 양극화 해소도 일자리 창출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승욱 중앙대 교수는 "남은 기간 시장의 신뢰로 문제를 푸는 것도 중요하다"며 "청와대를 설득해 분배정책 등의 방향을 선회하자고 건의하는 데서 비로소 리더십이 나올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양대 나성린 교수는 "워낙 위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 걱정이다"며 "권 부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이고 이로 인해 부총리까지 됐지만 정권과 코드를 맞추려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 "경기 낙관할 때가 아니다"=권 부총리는 지난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기존 경제정책을 예정대로 이행하면 5% 성장률이 달성되므로 현재의 경제정책 기조를 바꿀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낙관적 경기 전망을 근거로 나온 정책 판단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까지 하반기 경기 둔화를 예상하고 있는 상황인데, 연간 성장률이 5%에 이를 것이라는 낙관론을 고집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정갑영 연세대 교수는 "잠재성장률이 4%대에 머무는 것은 큰 문제"라며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경기가 너무 가라앉으면 성장 기반 자체가 무너져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의미다.

◆ "부동산 정책은 시장에 맞춰야"=현재 경제 난국의 시발점은 지나친 규제 위주의 부동산 정책이고, 따라서 경제 난국을 부동산 정책에서부터 풀어야 한다는 주문이 많았다. 김승욱 교수는 "부동산 정책이 민생 경제정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라며 "현 정부는 시장을 신뢰하지 않고 가격이 오르면 가격 자체를 낮추려고 세무조사와 담합조사 등 비(非)시장적 방법을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500조원의 부동자금이 몰려다니는 상황에서 세금 등으로 가격을 억눌러 부동산을 안정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양도세를 낮춰 주택 소유자들이 집을 팔고 나가게 해야 부동산 시장의 거래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종완 RE멤버스 사장은 "부산이나 대구, 광주에선 부동산 거래가 마비되면서 아파트의 초기 분양률이 10~20%에 그칠 만큼 주택경기가 침체돼 있다"며 "투기와 무관한 지역에서는 투기과열지구, 분양권 전매 제한 등과 같은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한.미 FTA 대내(對內) 협상 앞장서야"=한.미 FTA 협상은 권 부총리가 떠맡은 무거운 짐 중 하나다. FTA 협상이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음모론이 급속히 퍼지고 한.미 FTA가 체결되면 서민들의 생활 기반이 무너진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나도는 실정이다. 게다가 농민단체 등 피해가 예상되는 집단뿐 아니라 반미(反美) 세력까지 FTA 반대에 가세해 FTA를 정치적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미 FTA 타결을 위해선 미국과의 대외(對外) 협상보다 국내 반대세력과의 대내(對內) 협상이 더 중요해진 상황이다. 이 같은 대내 협상도 경제부총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다.

김동호.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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