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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기회는 많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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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1 “한·미 FTA도 새로 뜯어고치는데, 위안부 합의도 파기하고 다시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호기로운 기자 질문에 당시 외교부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하면 되죠. 단, 뒷감당을 할 수 있는지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2년여 전, 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 공약을 서두르던 때였다. 외교정책을 수립할 때 전후 사정을 다 고려해 전략을 세우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외교적 파장도 검토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에 청와대와 외교부의 답변은 “친일파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였다고 한다.

#2 지난해 10월, 한국으로 들어가는 불화수소의 수입에 차질이 생겼다. 알아보니 수출업체의 서류제출 과정의 실수였지, 일본 경제산업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납기가 단 하루 지연된 것이었지만 산업계는 덜컹했다.

실제 올 1월엔 자민당 내부에서 “반도체 재료인 불화수소를 막으면 한국 산업계에 타격이 클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자가 우리 정부로부터 들은 설명은 되려 “언론이 불안을 조장하지 말라”는 질책이었다.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 상대측 목적은 이미 달성된 것”이라며 겁박 수준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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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보복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올 초부터 이미 외무성, 경제산업성, 국토교통성, 법무성 등이 합동으로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한국에 취할 수 있는 대항 조치가 무엇이 있는지 리스트를 뽑고 논리개발을 해왔다. 검토 중인 대항 조치가 100개가 넘는다는 보도도 나왔고, 실제 경제부총리가 송금 중단, 비자발급 제한 같은 구체적인 말도 했다. 국제법, WTO 협정 등을 검토를 안 했을 리 없다.

그 결과 일본은 한국에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혜택을 없애는 방법으로 한국 산업계의 가장 아픈 곳을 때렸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불만이라고 하지만, 판결 자체보다 이후 한국의 대응에 대한 불만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하다. 사법부 판결을 존중하는 것과 외교적 협의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G20 직전에 내놓은 ‘한·일 기업 재원 마련 방안’이 몇 달만 빨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최근 일본 외무성은 한국담당과에 우수한 ‘코리안 스쿨(한국 담당 인재)’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오는 8월부턴 주한 일본 대사관에 ‘코리안 스쿨’ 중에서도 에이스들로 전열을 정비했다. 한국 친구가 많고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외교 현장에선 얼음보다 냉정하다. 우리는 지금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