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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나경원 인용한 '신독재 4단계'···文정부 대입하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4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문재인 정부를 향해 “이코노미스트지가 말한 신(新)독재 현상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나 원내대표가 인용한 건 지난해 6월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민주주의의 후퇴’(Democracy’s retreat)라는 제목의 기사다. 최근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민주주의 퇴보 현상을 다뤘다.

이코노미스트는 특히 “지나치게 단순화하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민주주의 퇴보 과정을 ▶1단계 위기 발생 뒤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집권 ▶2단계 적(敵) 규정 ▶3단계 사법기관 등 독립적인 기관 방해 ▶4단계 장기집권을 위한 규칙변경으로 규정했다. 나 원내대표는 이 부분을 인용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 것인데, 과연 적절한 인용일까.

헝가리 우파 정당 피데스 소속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AP=연합뉴스]

헝가리 우파 정당 피데스 소속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AP=연합뉴스]

①위기의 발생=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후반 국정 농단 사태에서 대통령 탄핵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위기’ 상황에서 출범한 정부다. 나 원내대표는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이코노미스트가 설명한 민주주의 퇴보 1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면에서 문재인 정부의 출범 과정에 대해선 긍정 평가가 우세하다. 이코노미스트가 평가하는 민주주의 척도(Democracy Index)에서 한국은 2016년 24위였으나 2017년 20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21위로 한 계단 내려앉았지만 말이다.

또 이코노미스트가 언급한 위기가 ‘경제 위기’라는 점에도 차이다. 이코노미스트는 “2007~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민주주의는 퇴행했다”고 설명했고, 금융위기 여파로 우파 정당인 피데스로 정권이 바뀐 헝가리를 사례로 들고 있다. 경제위기 때 대중이 민주주의를 잠깐 유예하는 대신 강한 지도자를 원한다는 주장은 오래됐다. 애덤 투즈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붕괴』에서 “대공황은 히틀러를 낳았고 금융위기 10년은 트럼프 대통령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AP=연합뉴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AP=연합뉴스]

②적 규정=이코노미스트는 2단계에서 “적절한 적을 찾는 것은 결정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든 예가 반(反)난민 정책을 펼쳐 3연임에 성공한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다. 이코노미스트는 “(오르반 총리에게) 이민자는 좋은 적이다. 투표권이 없기 때문에”라고 덧붙였다. 또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도 사례로 든다.

나 원내대표의 주장은 문 대통령의 적폐청산이 이런 예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김병민 경희대 겸임교수도 “적폐청산이 야당에만 너무 엄밀하게 적용되는 측면 있기 때문에 나 원내대표처럼 말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에 비해 이강윤 정치평론가 “문 대통령의 적폐청산은 특별법을 만들거나 혁명위원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법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6년 8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순국자 집회’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형제 부활을 거론하며 ’쿠데타 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천명했다. [연합뉴스]

2016년 8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민주주의와 순국자 집회’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사형제 부활을 거론하며 ’쿠데타 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천명했다. [연합뉴스]

③독립 기관 방해=3단계는 언론, 사법 등의 기관을 장악하는 단계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자국 언론사 130여 곳을 폐쇄하고, 최대 일간지 ‘자만’은 강제 법정관리를 시켰다. 또 폴란드 집권당인 법과정의당은 사법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대법관의 은퇴 연령을 70세에서 65세로 줄여 대법관 수를 줄였다. 유럽연합(EU)은 “사법 독립성 침해”라고 비판했다.

나 원내대표는 이런 현상이 문재인 정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한국의 언론 자유 순위를 보면 2017년 63위에서 지난해 43위로, 올해는 41위로 올랐다. 다만 사법부 문제와 관련해선,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미국도 대통령이 바뀌면 대법관 등이 바뀌지만 한국처럼 우리법연구회 등 특정 모임 출신 중심으로 교체하는 일은 없다. 이념 편향성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지난 4월 선거제도 개혁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위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장 앞에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운데)와 의원들이 선거제도 개혁 법안이 패스트트랙에 지정되자 회의장 밖에서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지난 4월 선거제도 개혁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위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장 앞에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운데)와 의원들이 선거제도 개혁 법안이 패스트트랙에 지정되자 회의장 밖에서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다. 김경록 기자

④규칙 변경=4단계는 “지도자를 쫓아내기 어렵게 규칙을 바꾸는 단계”다. 이코노미스트는 1~3단계는 아직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단계, 4단계는 민주주의가 멈춘 단계라고 설명한다. 나 원내대표는 지난 5월 “4단계로 선거제도를 바꾸는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선거제 개편안을 ‘지도자를 쫓아내기 어렵게 규칙을 바꾸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적다. 선거제 개편안이 민주당 등 다수당보다는 정의당 등 소수당에 유리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국당은 그러나 민주당보다는 한국당에 특히 불리하다며 “제1야당을 완전히 궤멸시키기 위한 선거법”이라고 본다.

윤성민·이우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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