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을 열지 않는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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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우리사회를 잇달아 강타하고 있는 밀입북·방북설·전교조문제등을 보면 우리 지도자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입이 무겁고 속이깊은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사태를 명쾌하게 밝히고 시원하게 결론을 내는 사람이 없다. 그 바람에 답답하고 불안한 것은 국민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내용은 뭔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건지 보통사람들로서는 알수도 없고 판단도 안선다.
가령 방북설의 두주역인 박철언장관이나 박찬종의원만 보아도 어찌나 입이 무거운지 어느쪽 말을 들어도 정리가 안된다. 6월에 방북했다고 주장한 박의원은 증거를 제시한다고 해놓고도 대통령과 면담한후에나 밝히겠다고 하고있고, 방북을 부인하는 박장관도 의심이 안풀리고 있음을 알텐데도 더이상 말을 않고있다. 그런 가운데 남북비밀접측설은 요란하게 터져나와 입무거운 지도자들만 계속 믿고 있으면 대북정책이 제대로 굴러갈 것인지 보통사람으로서는 궁굼증속에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김대중총재를 구인, 조사한 안기부도 입이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김총재 같은 거물을 구인까지 하자면 뭔가 그만한 까닭이 있었을것 같은데 그것이 뭔지는 통 내색을 않고있다.
김총재 역시 여간 속이 깊지않은 것같다. 소환에는 그렇게도 응하지 않더니 구인에는 응한 것도 범인으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였거니와 뭔가 할 얘기가 더 있었을 것 같은데도 끝내 속을 열지 않았다.
전교조문제에 대한 정치권의 신중한 자세는 탄복할만 하다. 벌써 석달째 이문제가 이렇게 시끄럽고 국민불안이 심각한데도 노동이권을 주자느니, 특별입법을 하자느니 말만 주고받으면서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없다. 전교조 문제가 결국 자기들이 입법하기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모를리 없는데도 어떻게 할 작정인지 그 깊은 속을 열지 않고 있다.
그저 국민들만 수천명의 교사들이 징계·파면돼도 괜찮은지, 정부와 교사들이 이런 극한대립으로 나가도 그뿐인지 불안하고 답답할 뿐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지도자들만 속이 깊은게 아니다. 「참교육」 을 위해 꼭 노동3권을 다 쟁취해야 한다고 연일 투쟁하는 전교조의 핵심멤버중에는 그 마음속 깊은 곳에 뭔가「참교육」만이 아닌 의도가 있는게 아닌가고도 생각되지만 이들의 입은 무겁기만 하다. 문규현신부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때엔 하지않던 마음속 깊숙한 말을 북한의 판문각에 가서야 마침내 털어놓았다.
정치·교육·종교등 사회각분야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처럼 너무나 입이 무겁고 속이 깊은 바람에 이들이 관련된 많은 일들이 국민에겐 그저 수상쩍고 의심스럽기만 할뿐이다. 이들이 하는 말이 다 정말인가. 그게 전부인가. 혹시 저분들이 감추고 속이는 일은 없는가.
이런 의문, 이런 궁굼증이 있고서야 문제가 풀렸다고 할수없고 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간다고 보기어렵다. 여기에 대한 확실한 해답과 확실한 의문의 해명없이는 오늘의 이 혼란·갈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국민이 어떤 국민인가. 해방이후 모르고도 속고 알고도 속은, 무수히 속아온 국민이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줄 알았다가 피난못간 국민이요, 유신체제가 되면 통일되는줄 알고, 5공헌법이 가장 민주적인줄 알고 국민투표에서 찬성투표를 강요당한 국민이다. 이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국민을 상대로 이제와 다시 통일· 민주화· 5공청산·참교육등의 이름으로 속이고 감추는 일이 있다면 결코 통할리 만무다. 이미 국민은 듣지않아도 짐작하고 보지않아도 감을 잡고있다.
부인하고 잡아떼고 어물어물 넘겨보자고 생각하면 정말 큰 코 다칠날이 올것이다. 그것은 정부나 정치권이나 재야나 다 마찬가지다.
이제부터라도 국민이 상투끝에 올라앉았다고 생각해야 문제도 풀리고 이 울적하고 오랜 공안정국에서의 탈출도, 만성적인 사회의 비정상적 분위기의 정상화도 가능할것이다.· 그러자면 첫째, 정부가 입을 열어야 한다. 방북설, 비밀접촉설은 어떻게 된건가. 이렇게 세상이 떠들썩한 비밀도 비밀일수 있는가. 하루빨리 밝힐 테두리를 정해 밝히고정책·인사·기구등의 재정비·개편을 서둘러야 할것이다.
둘째, 정치권의 역할회복이다. 국민이 궁굼하고 수상쩍게 여기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왜 대신 물어보지 않는가.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전교조문제에 대해서도 게으르게 말만 하고있을게 아니라 철야협상을 해서라도 빨리 결판을 내야한다.
셋째, 과격세력도 이제 선과 입장을 분명히 해야한다. 민주화와 「통일열정」 이 잇단 밀입북을 정당화하지 못함은 자명하다. 그런 명분이 명분과는 다른 실체를 보호할수 있던 시절도 이젠 지나가고 있다. 국민 마음속에 대충 윤곽이 파악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과감하게 비판하되 과감하게 수용할줄도 알아야 한다.
각계의 자칭타칭 지도자들은 이무더위속에서 국민이 더이상 속는다는 짜증이 안들도록 이제 제발 그 무거운 입과 그 깊은 속을 좀열어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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