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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생존자가 ‘밥은 챙겨먹었냐’ 할 때 눈물 핑… 일상 회복하고 건강하게 사셨으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7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내에 있는 진료실에서 만난 치과의사 이창준씨. 김정연 기자

지난 17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내에 있는 진료실에서 만난 치과의사 이창준씨. 김정연 기자

"사고 3주가 지났나요? 한 3달은 지난 것 같은데… 계절이 바뀐 느낌이에요"

다뉴브강 유람선 침몰 사고 수습 자원봉사자 이창준씨

지난 17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치과의사 이창준(33)씨는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직후 통역과 의료 지원을 해온 자원봉사자다. 대사관 관계자가 “사고 초기에 먼저 ‘뭐 도울 일 없냐’고 연락을 주셨던 분”이라며 기억에 남는 봉사자로 꼽기도 했다.

사고 당일 자정 병원 가장 먼저 도착한 3년차 치과의사

자원봉사를 희망한 세멜바이스 의대 한인학생들이 모인 대화방. 오전 1시까지 이어지는 일정에도 8명이 '가능하다'고 지원했다. 이씨는 "당시가 의대 시험기간이어서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다들 도와줘서 고마웠다"고 했다.[이창준씨 제공]

자원봉사를 희망한 세멜바이스 의대 한인학생들이 모인 대화방. 오전 1시까지 이어지는 일정에도 8명이 '가능하다'고 지원했다. 이씨는 "당시가 의대 시험기간이어서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다들 도와줘서 고마웠다"고 했다.[이창준씨 제공]

이씨는 10년 째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다. 헝가리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세멜바이스 의과대학 3학년에 재학하며 학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는 생존자 1명이 열흘 정도 입원해있는 동안 거의 병원에 상주하면서 통역과 각종 검사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사고 수습 과정 내내 세멜바이스 의대의 한국인 학생들도 지원에 나섰다. 이씨는 "사고가 났던 5월 말~6월 중순이 시험기간이다. 시험을 제대로 못 보면 한 학년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데도 자기 일처럼 도와준 학생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전했다. 이씨도 5개 과목 시험을 봐야 하지만 학교 측의 배려로 7월까지 시험을 미룰 수 있었다고 한다.

사고 가족, 스트레스로 불면증 가장 많아… "한국 의사·약사 친구들 도와줘 든든"

이창준씨가 혈압약 성분을 한국의 약사 친구에게 물어본 대화 캡쳐. 헝가리 현지시간 오후 10시 36분은 한국시간으로 오전 5시 36분이다. [이창준씨 제공]

이창준씨가 혈압약 성분을 한국의 약사 친구에게 물어본 대화 캡쳐. 헝가리 현지시간 오후 10시 36분은 한국시간으로 오전 5시 36분이다. [이창준씨 제공]

사고 초기엔 매일 호텔에서 생존자를 위한 의료 지원을 담당했다. 그는 “사고를 당한 분들은 초기엔 자신의 몸을 챙길 겨를이 없다”며 “갑자기 혈압이 위험할 정도로 높아져 급하게 약을 쓴 적도 있다”고 전했다. 이씨는 “스트레스로 잠을 못 주무시는 분이 가장 많았고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원래 드시던 당뇨‧혈압약이 떨어진 분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이번 봉사 과정에서 한국의 내과‧정신과 전문의, 약사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친구들이 ‘시차 생각하지 말고 아무 때나 연락하라’고 해줘서 정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오히려 의료진 걱정, '회복' 신호라서 마음 놓여"

17일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 인근에 놓인 추모의 꽃들. 5월 29일 유람선 사고 발생 2주가 지난 뒤 새로 놓인 꽃이다. 김정연 기자

17일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 인근에 놓인 추모의 꽃들. 5월 29일 유람선 사고 발생 2주가 지난 뒤 새로 놓인 꽃이다. 김정연 기자

“한 번은 생존자 가족분이 저를 안아주면서 ‘고맙습니다, 밥 잘 챙겨 드세요’ 할 때 눈물이 핑 돌았어요.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분인데.”

이씨는 “사고 초기에 경황없고 슬픔이 너무 커서 저를 인식도 못 했던 분들이 어느 순간 ‘선생님 살이 너무 빠지신 것 아니에요’라고 저를 걱정해줄 때 보람을 느꼈다”며 “한편으론 주변이 보일 만큼 조금은 회복됐다는 신호여서 마음이 놓였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 아래 놓인 추모의 꽃. 앞서 놓인 꽃이 마르고 그 곁에 새 꽃이 놓였다. 김정연 기자

지난 17일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 아래 놓인 추모의 꽃. 앞서 놓인 꽃이 마르고 그 곁에 새 꽃이 놓였다. 김정연 기자

지난달 사고가 난 유람선의 한국인 탑승객 33명 중 생존자는 7명, 사망자 23명, 실종자는 3명이다. 대부분 사망자에 대한 화장이 진행된 후 가족들은 귀국했고, 현재 헝가리 현지에는 실종자 3명의 가족을 비롯한 일부만 남았다. 이씨는 “초기부터 오래 보던 분들도 급하게 귀국하느라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못 한 분도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이번 트라우마가 지워질 순 없겠지만, 한국으로 가신 생존자와 가족들도 빨리 일상을 회복하시고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선 오히려 관심이 조금 식은 것 같은데 헝가리에서 이번 사고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충격이고 오래 남을 것 같다”며 “저도 평소 없던 불면증, 악몽도 가끔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찾지 못한 3명이 있고 가족들의 삶은 너무 힘든 상황이니까 계속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부다페스트=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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