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굿판' 말의 상처 지우듯 … 짧고 짧아져, 선시 같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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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해 3월 김지하(65) 시인이 인터넷 채팅에 처음 도전했을 때 일이다. 거기서 '토란잎'이란 ID의 네티즌이 1991년 분신 정국 얘길 꺼냈다. 시인이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라는 글을 쓴 이유를 물은 것이다. 시인은 이내 "운동권 선배로서 손뼉을 치겠습니까, 침묵을 택하겠습니까. 생명을 살리면서 끝까지 운동을 연속시키라는 부탁이었습니다"고 답했다. 당황했을 텐데, 시인의 대처는 노련했다. 채팅은 자연스레 다음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시인의 신작시집 '새벽강'(시학)이 나왔다. 거동 불편한 시인이지만 근자엔 이태에 한 번꼴로 시집을 펴낸다. 시집을 펼쳐보니 채팅 때 일화가 들어있었다. '토란잎'이란 시다. '내 평생/처음인 채팅에서//토란잎이 질문했다/나는/이름이 예쁘다고 칭찬했다.//…//더 이상 토란잎은 어여쁘지 않았다.//…//토란잎!//이름처럼 첫 질문도 항상/어여쁘게 하라.//그것이/토란잎이라는 이름의/생명과 평화의 길,//바로/시다.'

이제야 알았다. 그때 시인은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언짢았던 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하려면 항상 어여쁘게 하라고, 그것이 바로 시라고, 점잖게 충고한 것이다.

시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노승의 선시가 연상됐고 옛 시조 한 자락이 떠올랐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미지들의 범벅,/제유와 환유의 밀림에서/벗어나기로 했다.//…//말의/자발적 가난은/이제/시 이상이다'('가난'부분). 그러고 보니 시집에서 가장 자주 띄는 시어도 '시'다. 시인의 심기를 건드린 네티즌에게 던진 충고도 '시'고. '다른/할 일 없어서/쓴다.'('시 쓰는 새벽'부분)는 시인의 고백이 뜨겁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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