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비어와 민생치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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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는 과연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2일 치안본부가 그 진원 색출 수사에 나서겠다고 밝힌 「악성 유언비어」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다시 한번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약수터에 갔던 동네 주부가 인신매매단에 납치돼 원양어선에 팔러갔다』 『어린이를 납치해 개소주를 만들어 AIDS약으로 판다』 『노인은 기름을 짜 문둥병 약에 쓴다』…….
이것이 20세기 문명국가 사회인가, 원시 식인 부족사회인가.
이런 황당무계하고 끔찍스런 유언비어가 4월 이후 전국에 유포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경찰은 그래서 시국불안 상황을 틈탄 불순세력의 계획적인 공작으로까지 보고 진원을 색출하겠다고 나섰다.
경찰의 심증이나 추정대로 대남 심리전 차원의 공작일 가능성도 물론 배제할 수 없다.
유언비어는 사실무근일지라도 때론 사실로 확인된 정보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사회에 불신의 짙은 안개를 씌우고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며 일상생활의 행동에 제약까지 가할 수 있다. 허황된 유언비어가 폭동을 유발하고 전쟁에서 전선을 무너뜨리며 정권을 바꾼 사례조차 드물지 않다. 공안당국의 입장에서 진원색출 수사는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킨다는 측면에서도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유언비어는 그 속성상 진원을 밝혀내기가 지극히 어렵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래서 유언비어 자체보다 그 같은 유언비어가 사그라지지 않고 몇 달째나 계속 확산되고 있는 사회의 현 상황이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서 확인된바와 같이 유언비어는 불안한 사회에서 유포된다. 사실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회에서 실현가능성이 있고 개연성이 있는 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황된 것으로 처음부터 일축 당하고 설혹 어떤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더라도 곧 사그라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광범하게 유포되는 유언비어는 사실과 차이가 있으면서도 사실 이상으로 그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나도는 문제의 유언비어도 분석해 보면 몇 가지 사실을 알맹이로 하고 있다.
부녀자 납치·인신매매·AIDS 등은 현재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다. 그것이 몹시 과장되고 왜곡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는 한마디로 오늘의 치안부재 상황과 인명경시 풍조의 복합적 투영 속에서 유언비어가 유포될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치안부재 속에서 공포에 떠는 민심이 바로 유언비어의 발생처이자 서식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범죄가 그 사회의 밑바닥을 비추는 거울이듯이 유언비어도 그 사회의 한 측면을 비추는 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음미해야한다.
그러면 유언비어를 막는 길은 자명해진다.
민심에 극도의 불안을 주고 있는 치안문제를 효과적이고 가시적으로 개선하는 일이다.
모든 불안의 근원인 치안문제의 근본적인 상황 개선 없이 유언비어의 진원 색출이란 공염불이다.
치안질서의 확립, 건전한 가치관의 고양으로 건강한 사회를 회복하는 것만이 유언비어를 막고 적대세력의 심리전공작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키는 첩경이다. 허튼 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시민의 양식과 당국의 노력이 합쳐져야 고질적인 유언비어 체질 개선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치안당국의 진원 수사가 공안 정국과 겹쳐 또 다른 불안요인이 되지 않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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