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제단」의 생각은 어떤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범상한 세계를 사는 우리들이 성직자를 대하는 느낌은 좀 각별한 데가 있다.
세속의 온갖 잡정과 번뇌를 다 떨쳐버리고 신의 교리를 지선으로 받들며 그의 대리자로서 인간구원에 헌신하는 신분에 대한 존경이나 신뢰가 우리들 속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1일 밤 TV를 통해 접한 한 성직자의 언동과 행태는 우리들의 이 같은 인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공식 대표로 북에 파견했다는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 북측 구역 판문각에 나타나 그쪽 동조자들과 함께 남쪽을 향해 핏대를 세우고 주먹질을 하며 구호를 의치는 모습은 존경의 대상이었던 성직자가 아니라 북한정권의 대변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로만 칼러는 연극배우의 엉성한 분장같이 보였다.
그는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미 제국주의자들의 한반도 철수』와 『미제 하수인 노태우 정권은 민족의 적』이라고 외쳐댔다.「고난받는 한 마리의 어린 양」 임수경양을 보호하고 통일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북한에 들어갔다는「성직자」가 북한의 일방적 통일노선에 완전 동조하여 그들의 일관된 주장을 용어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과 함께 외쳐대는 작태를 보인 것이다.「미제」를 몰아내고 현정권을 민족의 적으로 몰아붙이면서 한사코 휴전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겠다는 시나리오가 의도하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경악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진정 민족통일의 염원과 열정에 불타는 성직자라면 좀더 그의 신분에 걸맞게 합리적이고 균형 있는 언동과 태도를 보였어야 했다. 분노와 증오의 외침보다는 사랑과 화해를 역설하는 것이 성직자로서의 도리일 것이다. 세습적으로 권력승계를 기도하면서 대를 이어 지도자를 우상화하고, 40년 이상 1인 독재로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폐쇄된 왕국으로 통치하는 것이 바로 북한체제가 아닌가.
자유 세계는 물론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까지도 위험시하는 북한의 모험주의적 통일 노선과 그 결과로 빚어진 수많은 대남 테러사건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이쪽을 향해서만 타도해야할 「민족의 적」이니 하는 것은 성직자로서는 물론이요, 시정배의 인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한심한 통일관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도발위협이 사라지고 전쟁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평화에 대한 남북상호신뢰가 확고해질 때까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야 한다는 것은 국민이 합의한 원칙이다. 또한 국민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정부는 일을 잘하라는 편달의 대상은 될망정 북에서 주장하는 식의 타도의 대상일 수는 없다.
이제 문 신부를 파북하고 이를 추인한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런 그의 언동이 문 신부의 자의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사제단의 대표로서 미리 합의된 언동인지를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날 이 나라 민주화 실현에 기여해온 사제단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통일논의와 같이 온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에 대해 문 신부를 파견한 사제단은 확실한 입장을 국민 앞에 공개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