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체험」나누며 창작 일깨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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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북적거리는 시정과 복잡한 일상을 탈출, 인간정신의 고향을 찾아 시인과 독자들이 해변에서 만났다. 가난한 시 전문지 『심상』이 여름방학으로 꼬마들이 비운 바닷가 국민학교를 빌려 세운 해변시인학교. 올해로 11회째를 맞는 해변시인학교가 지난달 28∼31일 강원도 명주군 사천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아이들 같은 설렘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시인은 1백여명, 독자는 2백20여명. 서울에서 황금찬 김광림 성춘복 박이도 이근배 장윤우 박현태 감태준 이충이 윤강노 문효치 이상호 박상천씨, 대구 이기철, 부산 조의홍, 전주 이시연, 대전 신협, 서산 박만진, 남원 박종수, 속초 이성선, 춘천 이영춘씨 등 전국 각지의 시인들이 모였다.
독자들의 지역이나 직업도 다양했다. 군인·교사·정당원·기자·주부·학생·실업자·회사원·상인 등등. 이들 시인과 독자들은 모이자마자 교장에 황금찬, 교감 이명수, 교무주임 이상호씨를 추대한 뒤 남자 2반, 여자 6반의 8개 반을 만들고 각 반의 담임선생님과 반장을 뽑아 훌륭한 학교체제를 갖추었다.
태풍과 폭우로 이틀 간 바닷가에 못나가고 교실에만 갇혀 지내도 시인과 독자들은 한결같이 흡족한 표정이었다. 비 덕분에 차라리 이렇게 꽁꽁 갇혀 대화하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 초라하고 단아한 교실은 바로 내 혼의 공간이에요.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주 먼 옛날 내가 잃어버린 핏줄을 찾은 것 같아요. 글쎄, 일상에서 혹시 들킬세라 깊이깊이 묻어둔 내 혼의 울림들을 모두들 내고 있지 않겠어요. 짜릿짜릿한 감전이에요. 혼의 잇닿음에 의한.』
돌도 채 안 지난 아기까지 데리고온 한 주부는 해변시인학교를 숫제 「혼의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학교 문학서클에서의 합평회는 지식위주로 흘러 자기가 접한 문학이론을 자랑하는 일종의 지식경연장이 돼버리지만 여기시는 체험위주로 만나는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시에 대한 체험을 나누는 것 자체가 훌륭한 문학수업인 것 같아요.』대학 국문과 4학년에 재학중이라는 한 여학생은 해변시인학교를 가식 없는 시적 체험의 이야기장소로 높이 샀다.
『시를 쓰려 해도, 아니 내 문학도 시절의 깨끗한 시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려 해도 현실의 모든 여건이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차츰 멀어져가고 있는 내 양심, 시정신을 찾으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3박4일 동안 충전된 시정신으로 나는 그렇게 1년 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자영업을 하고 있다는 30대 중반 남자의 말이다.
시인이 아니면서도 시인보다도 더 치열한 시정신으로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의 시적 체험들은 기성시인들의 시보다 차라리 감동적이다. 그러나 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언)로 지은 사원(사)인 것을, 가슴으론 혼을 내보이되 붓끝으론 교묘하게 감출 수 있어야만 비로소 시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한 시인과 5∼6명의 학생이 모여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하며 그 시의 창작 과정을 얘기하거나 학생들이 써온 시를 가지고 격의 없이 합평하는 시간은 바로 말을 가지고 사원을 짓는 법, 감추는 법을 익히는 시간이다.
비도 그쳐 해변가에 나가고 캠프파이어로 이별파티까지 마친 마지막 밤 자정 넘은 시간에 자정백일장이 개최됐다. 밤새도록 학생들은 시인의 꿈을 안고 절대고독의 원고지 칸에 한자한자 혼을 짜 맞춰갔다. 더 깊고 넓은 혼의 울림을 위해 숨기라는 이치를 깨닫고 나서.
다음날 낮 심사발표 때 시인의 영예를 주는 장원은 나오지 않았다. 전원일치제라는 심사의 엄격함 때문일까. 그러나 해변시인학교 수료증을 하나씩 받아든 학생들은 모두 의연하고 자랑스러워 보였다.
3박4일을 은밀히 감춰둔 시심의 카타르시스로 끝낸 것이 아니라 일상을 올곧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정신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근본적이고 강렬한 현실기능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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