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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만 외치고 책임은 외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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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택시요금이 오른 직후인 지난달 5일 택시를 탔던 회사원 서 모씨(28)는 요금인상 때마다 택시업체들이 부르짖는 서비스개선이 이번에도 역시 요금인상을 위한 번지르르한 겉치레 구호였음을 실감해야 했다.
퇴근 후 모처럼 회사 동료들과 술자리를 갖고 택시 승차대에 나와 『신내동!』을 외쳐댔지만 빈 택시들은 정류장 앞을 멈칫대다 이내 줄행랑치기 일쑤였다.
서씨는 「행선지가 나빠 그러겠거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10여분간을 기다려 겨우 한 택시에 올라탔으나 택시기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한마디 양해 없이 합승객을 구하려고 차를 서행하며 인도를 기웃댔다. 더욱이 그 운전기사는 마땅한 합승객이 나타나지 않자 지름길인 3·1고가도로를 제쳐두고 청계천도로를 따라가며 합승객을 호객했다.

<택시서비스 아득>
『슬며시 괘씸한 생각이 들어 내릴 때 거스름돈 50원을 요구했더니 눈을 한번 흘깃하더니 거지 동냥 주듯 내던지더군요.』
『택시요금 인상하여 서비스개선 이룩하자』고 하도 떠들어 「혹시나」했더니 이번에도 「역시나」였다고 서씨는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지수 1천대를 넘어섰던 주가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던 4월 12일 여의도 D증권 객장.
연3일째 주가가 유례 없이 폭락하자 일부 투자자들이 몰려와 『증권사 말만 믿었다가 손해를 보았으니 보상해 달라』며 투자상담직원 한 모씨(30)의 멱살을 잡고 전표를 찢는 등 아우성쳐 정상업무가 마비되고 말았다.
이날 처음으로 고객에게 짜증을 내봤다는 한씨는 『자신이 판단할 권리를 포기, 증권사 직원에게 일임해놓고도 오를 땐 가만있다가 떨어지면 욕하는 게 보통』이라고 투자자들의 얄팍한 생리를 서운해했다.
요금인상만을 요구하고 서비스는 외면하는 택시업계나 주가폭락으로 인한 손해를 증권사 직원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는 투자자들에게서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질줄 모르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의식을 확연히 불 수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장안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교도소 호송차 탈주범들이 마지막으로 절규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인생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음에도 지은 죄에 비해 형량이 너무 가혹했다며 판사를 원망하는가 하면 모든 책임과 죄를 「돈없는 탓」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경향은 정치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야 할 것 없이 명백한 과오나 실책에 대해 스스로가 먼저 책임지기보단 정치적 이용을 경고하면서 상대방의 허점을 찾아 모든 책임을 타당에 돌리려 한다.

<진취성 간 곳 없어>
이 같은 우리사회의 책임전가와 무책임은 공직자들에겐 무사안일·보신주의·졸속 등의 병폐로 드러나 우리사회의 환부를 더 깊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몇 해 전 호남지방에서 비브리오 패혈증 환자가 발생하자 보건당국이 상부나 여론의 질책을 지나치게 우려, 서둘러 어패류의 판금령부터 내린 것은 어민등 수산업 관련 종사자들의 생계에 엄청난 피해를 입혀 결과적으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 꼴이 돼버렸다. 건강한 사람에겐 걸리지 않는 병이라는 점에 비추어 판금령 보다는 철저한 방역과 함께 계몽에 주력했어야했다는 것이 의학전문가들의 안타까운 지적이었다.
우리사회가 책임의식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보신주의에 빠지게된 가장 큰 요인은 자아의식·주체성이 희박한 탓이며 이러한 몰주체성은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진취성 발휘는커녕, 폐해로 나타나기 쉽다는 전문가의 분석이다.
가정주부 강 모씨(38)가 지난 3월 누군가 자신의 신용카드로 40만원 어치의 의류를 구입해간 사실을 안 것은 집에 도둑이 든지 한달 뒤였다.
카드가 도난품에 포함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은행측의 대금결제요구를 받고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런데 범인이 카드를 사용한 C패션대리점의 매출전표엔 카드 뒷면의 한자서명과 전혀 다른 영문서명이 기재돼 있었다. 이에 강씨는 서명의 대조의무를 소홀히 한 C패션 측의 실수를 들어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C패션 측은 자신의 확인의무를 제쳐두고 분실신고를 게을리 한 강씨의 책임이 크다고 고집, 배상을 미루다 소비자보호원의 배상결정조정까지 받았으나 아직도 배상을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4월 54명의 사상자를 냈던 버스 한강추락사고도 개당 5만여원을 아끼려고 재생타이어를 사용해왔던 한 버스운수업자의 비양심과 무책임이 빚어낸 참극.
우리 사회는 자기 직분이나 본분에 충실하기보다도 인간관계가 각박해져가고 이기주의가 팽배해져감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이 같은 책임회피 현상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기현상을 낳고있는 것이다.
또 두둑한 배짱이 존경(?)받다보니 자칫 꼼꼼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오히려 「꽁생원」으로 몰리는 부작용도 생기고 있다.

<생존권주장 급급>
이렇게 책임에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는 자신의 무책임한 행위로 인한 영향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다. 일부 노점상들의 생계대책마련 요구시위를 보는 시각이 착잡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국은 환경오염·교통방해 및 사고위험조장 등을 이유로 기습강제철거를 하지만 노점상들은 자신들로 인한 시민불편은 일단 제쳐두고 생존권 주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단속하는 당국이 야속하기만 한 것이다.
무심코 버린 담뱃불로 인한 산불에서부터 뺑소니, 노상주차, 학생들의 눈치나 보는 교수들의 보신주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깊이 파고든 「책임정신의 고갈현상」을 두고 전문가들은 날로 치열해져 가는 자본주의 경쟁사회의 속성과 이에 따른 이기주의의 팽배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민주사회는 선택을 보장하며, 그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국가·사회윤리보다 가족·개인윤리가 우선되는 오늘날엔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인책은 없고 주장과 변명만 무성하게 됐다』고 분석한 서울여대 윤종주 교수(사회학)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덕·법규범 등의 권위회복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안남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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