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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평등' 법 개정 막히자 DJ에 건의, 여성계와 면담 주선도

중앙일보

입력

10일 별세한  고(故) 이희호 여사는 ‘1세대 페미니스트’라고 평가된다. 그는 법조계에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이끈 두 ‘획기적 사건’에도 발을 벗고 나섰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89년 이뤄진 3차 가족법 개정과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이다.

'재산 분할 평등' 가족법 개정 이끌어 #"성평등 씨앗 뿌린 거목"

과거 2000년도 제37회 전국여성대회에 참가해 수상자들과 악수했던 고 이희호 여사의 모습. [중앙포토]

과거 2000년도 제37회 전국여성대회에 참가해 수상자들과 악수했던 고 이희호 여사의 모습. [중앙포토]

1990년대로 접어들 즈음 우리 헌법은 ‘남녀 평등’을 규정하면서도 여전히 남녀 차별적인 제도를 두고 있었다. 남편 쪽은 8촌까지 모두 친족으로 인정하면서도, 아내 쪽은 4촌까지만 인정했다. 남편의 혼외자 등은 자유롭게 자식으로 들일 수 있었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았고, 재산권 행사나 상속에서도 남편과 아들에게만 유리한 구조였다. 법 개정으로 이런 차별적인 조항은 모두 사라지거나 수정됐다.

이 때 호주제(집안의 가장을 중심으로 출생ㆍ혼인ㆍ사망 등이 기록되는 제도) 폐지를 두고서도 논쟁이 일었는데, 이는 15년 뒤 호주제가 실제로 폐지되기까지에 있어 첫 걸음이 됐다.

 당시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데는 이 여사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희호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에 따르면 이 여사는 가족법 개정을 평생의 소원으로 꼽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법 개정 논의에 선뜻 나서지 않았고, 이에 이 여사가 직접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 여사는 ”다른 정치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족법 개정 문제만큼은 내 생각을 남편에게 말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도 여권 신장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를 들어주었고, 가족법 개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촉구하고 나섰다. 정기 국회 마지막날 가족법 개정안은 국회를 무사히 통과했다.

1999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의 남녀차별을 금지한다”는 남녀차별금지법 탄생 이면에도 이 여사가 자리했다. 당시 법 제정을 주도한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여성부 전신) 윤후정 위원장과 김 전 대통령의 면담을 이 여사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윤 위원장은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협조를 구했고, 난항 끝에 법이 통과됐다.

이 법으로 인해 그동안 당사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직장 내 ‘성희롱’을 정부 차원에서 이를 감독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이후 2000년대 들어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헌법불합치 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판결들이 쏟아졌고,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과 여성 대법관(김영란)도 등장했다.

11일 정의당은 논평을 내고 “이 여사는 여성 운동의 거목”이라며 “오늘날 대한민국 곳곳에서 번지는 성평등 변혁의 물결은 이희호 여사가 뿌린 씨앗에서 싹텄다”고 밝혔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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