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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과거사위·진상조사단은 왜 '리뷰' 당할 처지에 놓였나

중앙일보

입력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이 지난 3월 공개한 익명의 제보편지. [대검 산하 과거사 진상조사단 제공]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이 지난 3월 공개한 익명의 제보편지. [대검 산하 과거사 진상조사단 제공]

"오늘이나 내일쯤 서울고검 기자실에 가서 기자회견을 열지 고민 중입니다."

지난 3월 27일 김갑배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장이 기자와의 통화에서 화가 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발단은 이렇다. '김학의 사건'을 조사 중이던 과거사위의 실무기구인 대검 진상조사단은 전날 익명의 제보 편지 한 통을 언론에 공개했다. 사건의 핵심 인물인 건설업자 윤중천(58)씨와 친분이 있던 박모 변호사(전 차장검사)의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박 변호사가) 과거사위원장인 김갑배 변호사와 절친(연수원 17기 동기)이어서 그런지 매우 의심스럽다"는 편지 내용에 김 위원장은 격분했다. 당시 그는 "제보 편지에 언급된 박 변호사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한다"며 "제보자와 문제의 변호사 이름은 다 가려놓고 내 이름만 등장시켜 마치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는 게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며 반발했다.

이어 "중요한 제보 편지라면 조사단이 공개하지 않고 조사해야 했다"며 "조사에 핵심적으로 필요한 내용이면 추가 조사를 진행해야지 언론에 그대로 알리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앞서 조사단 일부 위원과의 의견 차이 등으로 인해 사의를 표명하고 과거사위에 출근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피의사실 공표'…진상조사단의 '내로남불'

김갑배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장. [연합뉴스]

김갑배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장. [연합뉴스]

과거사위는 지난 검찰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출범한 조직이다. 조사단은 과거사위의 조사 실무 기구로 꾸려졌다. 과거사위는 검찰의 '주요 적폐 행위' 중 하나로 피의자 압박 및 수사 여론전을 위한 '피의사실 공표'를 선정하고 조사를 벌여왔다.

조사단의 보고를 토대로 과거사위는 지난달 28일 '피의사실 공표' 문제에 대한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는 "검찰은 수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공소 제기 전 피의사실공표를 통해 피의자를 압박하고 유죄의 심증을 부추기는 여론전을 벌이는 등 관행적으로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사단의 편지 공개는 과연 정당한 행위인가. 위 과거사위 발표 문구에서 '검찰'을 '조사단으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건설업자 윤씨와 한상대 전 검찰총장,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의 유착 정황이 일부 언론에 보도될 당시엔 조사단 내부 메신저 단체채팅방에서 조사 내용 유출과 관련한 다툼도 있었다고 한다. 조사단 내부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 줄줄이 언론에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수사권이 없는 조사단은 강제수사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조사단은 지난 3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소환 조사할 예정"이라고 언론에 공표한 뒤 김 전 차관이 출석하지 않자 "소환 불응으로 조사하지 못했다"며 다시 언론에 알렸다. 당시는 김 전 차관에 대한 검찰 재수사가 이뤄지기 전이다. 피의사실 공표를 검찰의 대표적 병폐로 지목해놓은 조사단의 이율배반으로 볼 수 있다. 조사단 역시 '피의자를 압박하고 유죄의 심증을 부추기는 여론전을 벌이는 등 관행적으로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닌가 자문해봐야 한다.

과거사위·진상조사단의 중립성 논란

김용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위원이 지난달 29일 오후 과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범죄 의혹과 과거 검·경 수사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용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위원이 지난달 29일 오후 과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범죄 의혹과 과거 검·경 수사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사위와 조사단의 정치적 중립성을 두고도 여러 뒷말이 나온다. 과거사위 발족 당시 위원 9명 가운데 6명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출신이었다. 과거사위가 재조사 사건을 선정하기 전부터 편향성 논란이 일었다.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사건(2010년),'탈북간첩' 유우성씨 증거조작 사건(2012년), 김학의 전 차관 사건(2013년) 등 과거사위가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본 사건 상당수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검찰 수사와 관련된 부분이다.

한때 조사단 공보를 담당했던 이규원 검사의 파견 과정도 의문에 휩싸여있다. 그는 주요 재조사 사건에 대한 조사단의 입장을 언론에 알려왔다. 김 전 차관이 3월 해외 출국 시도를 할 당시 '긴급출국금지 요청'을 해 적법성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조사단 파견 검사의 경우 대검에서 인사와 관련한 의견을 제시하고 법무부가 승인한다. 그런데 당초 대검이 법무부에 보낸 파견 검사 명단에 이 검사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고 한다. 대검과 법무부 모두 이 검사의 조사단 파견 과정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위가 수사권고를 한 '김학의 사건의 청와대 외압 행사 의혹' 당사자로 지목된 곽상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진상조사단에는 이광철 청와대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과 과거 같이 민변에서 활동했고, 같은 법무법인 소속이었던 이규원 검사가 파견을 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광철 청와대 선임행정관이 진상조사단 파견검사로 추천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검찰 과거사위가 당시 민정수석비서관 및 민정비서관을 특정해 수사권고 한 것이 과연 과거사위가 과거의 과오를 바로잡자는 것인지, 정권의 입김에 보복성 표적 수사 지시를 위해 작당 모의를 하는 것인지 조사해야 합니다."

곽 의원은 이 검사와 청와대의 '사건 짜 맞추기' 의혹을 제기하며 대검에 감찰요청서를 제출한 상태다.

왜 한상대·윤갑근만 거론했나?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건설업자 윤중천씨가 구속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청사를 나서는 모습. [뉴스1]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건설업자 윤중천씨가 구속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청사를 나서는 모습. [뉴스1]

윤씨는 부동산 시행업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점'은 참여정부 시기다. 법원 판결문 등에 따르면 윤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진 고 강금원 회장과도 인연이 있다. 구속된 김 전 차관의 뇌물 혐의엔 윤씨가 김 전 차관의 검사장 승진 청탁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노력이 포함돼 있다. 윤씨는 김 전 차관의 검사장 승진 청탁 창구로 수도권 지역의 유명 대학병원장 출신 박모씨를 지목했다. 박씨가 참여정부 핵심 인사의 수술을 맡아 당시 청와대에 이른바 '말발'이 먹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윤씨의 말을 모두 믿을 순 없다. 다만 조사단이 한 전 총장과 윤 전 고검장 등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 것을 보면 조사 과정에서 나온 윤씨의 진술을 상당 부분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윤씨의 입에선 과연 한상대·윤갑근만 튀어나왔나.

윤씨는 검찰의 수사 착수 전 기자와 수차례 만나 자신과 친분이 있던 여러 인사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물론 참여정부 핵심 인사의 이름도 여럿 나왔다. 기사화하지 못했던 건 그의 말만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씨의 말 가운데 상당 부분은 확인되지 않거나, 취재 과정에서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단순히 윤씨와 알고 지낸다거나, 또는 별장에 방문했다거나, 부부동반 모임을 한 것을 들어 "당신도 성접대를 받았을 것이야"라고 무책임하게 보도할 수 없었다.

'김학의 사건' 조사팀에서 활동했던 박준영 변호사는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수사는 구체적인 혐의와 증거 등 처벌 가능성이 있어야 개시할 수 있는 것"이라며 "별장의 용도가 접대뿐이었는지(가족모임 등), 의혹 대상자의 별장 출입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성접대 등을 받았는지, 대가관계는 인정되는지, 공소시효는 남았는지 등 여러 의혹 등을 구체적이고 긍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어야 수사를 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 출신인 법무법인 동인의 김종민 변호사는 "과거사위의 김학의 사건 발표는 한 편의 소설을 보는 것 같다"며 "헌법상 무죄 추정 원칙은 쓰레기통 속에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작품처럼 보인다"고 맹비판했다. 이어 "법률가로서의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이 있다면 관련 기록과 증거를 조목조목 제시하면서 기존 수사가 명백히 잘못되었음을 합리적 의심 없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했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이들에 대한 수사 촉구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정치적인 의도는 과연 없었는가. '김학의 사건' 최종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를 위한 입법적 논의에 법무부와 검찰이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적시한 대목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18개월 만에 막을 내린 과거사위 활동에 대해 서울지역에 근무하는 현직 검사는 "모든 사건 처리에 대해 '리뷰' 당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평가했다. 과거사위의 발표에 대해 한 전 총장과 윤 전 고검장, 용산참사 검찰 수사팀 등은 과거사위와 일부 조사단원에 대해 검찰에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장을 제출한 상태다. 이들 역시 곧 '리뷰' 당할 처지에 놓였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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