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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틀니 값 달라" 구청 통째로 태울뻔한 60대 민원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구 남구청에서 28일 오전 인화 물질을 뿌려 불을 지르려한 민원인을 제압한 조재구 남구청장이 사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조 청장은 탁자를 딛고 건너편으로 넘어가 민원인을 제압했다. 백경서 기자

대구 남구청에서 28일 오전 인화 물질을 뿌려 불을 지르려한 민원인을 제압한 조재구 남구청장이 사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조 청장은 탁자를 딛고 건너편으로 넘어가 민원인을 제압했다. 백경서 기자

지난 28일 오전 9시40분쯤 대구 남구청장실. 조재구 남구청장과 면담하던 A씨(61)가 “같이 죽자”며 가방 안에서 인화 물질이 담긴 500㎖ 생수통을 꺼냈다. 그는 자신의 몸과 바닥에 인화 물질을 붓고는 가방에 든 라이터를 집었다. A씨가 불을 켜려 손을 대자마자 건너편에 앉은 조 구청장이 탁자 위를 넘어가서 순식간에 라이터를 빼앗았다.

대구 남구청장실서 면담 도중 "같이 죽자"며 #인화 물질 몸·바닥에 뿌리고 라이터 든 60대 #조재구 남구청장, 탁자 뛰어 넘어 민원인 제압 #한 해 폭언·폭행·반복 등 특이민원만 3만건

이날 사건 후 찾은 구청장실에선 인화 물질 냄새가 가득했다. 태권도 2단으로 A씨를 제압한 조 구청장은 “60대라지만 190㎝ 정도의 거구여서 지금 제압 못 하면 구청 전체가 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여동생 틀니값으로 300만원을 달라고 요구했는데 거절하자 갑자기 돌변했다”고 말했다. A씨는 도망가다 구청 입구에서 경찰에 현주건조물방화 예비 혐의로 체포됐다.

남구청에 따르면 A씨는 올 1월부터 “여동생을 아프게 한 건 구청”이라며 민원을 넣어왔다. A씨의 여동생이 4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그의 과거 남자친구가 방송을 보고 남구청에 “연락처를 달라”고 부탁해 두 사람이 연결됐다는 이유다.

남구청 관계자는 “당시 직원이 ‘번호는 알려줄 수 없지만, 그분께 연락이 왔다고 전해 드리겠다’고 했다”며 “두 사람이 만나면서 여동생이 정신적, 육체적 병을 얻었기에 오빠가 여동생의 치료비를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구청장은 “사실 민원인이 폭행·폭언을 일삼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며 “평소 일선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두렵겠냐”고 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서 폭언·폭행, 반복민원 등의 특이민원은 2015년 3만7004건, 2016년 3만4566건으로 한 해 평균 3만건 이상이다. 특이 민원이 폭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지난해 5월에는 술을 마시고 대구 서구의 동사무소를 찾은 한 민원인이 “왜 복지비 지원이 안 되냐”며 항의하다 공무원의 팔을 비틀어 전치 5주의 상해를 입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지자체에서 악성 민원인을 온정주의식 방법으로 해결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지난 1월 대구 달서구청에서는 50대 민원인에게 공무원이 모은 이웃돕기성금 1000만원을 건넸다. 민원인이 “구청에서 도로를 만들어 운영하던 식당이 철거됐는데 보상금이 적다”며 2년 넘게 이틀에 한 번꼴로 찾아와 업무가 마비돼서다. 행안부 관계자는 “사회복지 업무의 경우 악성 민원이 많아 공무원들이 돈을 모아 근처 슈퍼에서 쌀을 사 주기도 한다”며 “위법은 아니다”고 했다.

지난 27일 영덕군청 공무원 노조가 "공무원을 폭행한 민원인에 엄벌을 내려달라"고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 영덕군청 공무원 노조]

지난 27일 영덕군청 공무원 노조가 "공무원을 폭행한 민원인에 엄벌을 내려달라"고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 영덕군청 공무원 노조]

공무원 노조는 집회를 열어 “공무원을 지켜달라”고 호소한다. 지난 27일 영덕군청 앞에서 영덕군청 공무원 노동조합원 150여 명이 “욕설하고 흉기로 위협하는 민원인을 엄벌에 처해달라”며 성명을 발표했다. 영덕군청에 따르면 최근 민원인 한 명이 불법 건축물을 지적하는 공무원과 다투다가 흉기로 위협했고, 또 다른 주민은 민원을 제기하다 공무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전국공무원 노동조합 측은 악성 민원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최현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대변인은 “악성 민원은 업무 방해에 그치지 않고 공무원을 폭행하는 사고로 이어진다”며 “행안부에 공무원 인권 향상을 위한 매뉴얼과 폭행이 벌어졌을 경우 사법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통해 강력하게 대처하는 조례 마련을 요구한 상태”라고 말했다.

대구=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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