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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중 피습돼 숨진 버스기사···法 "업무상 재해 아니다" 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5일 버스차고지에서 시내버스가 운행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 [연합뉴스]

지난 15일 버스차고지에서 시내버스가 운행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 [연합뉴스]

운전 중이던 여성 버스 기사 몸에 한 50대 남성이 인화물질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 사고로 전체 피부 80%에 이르는 화상을 입은 버스 기사가 숨졌다. 버스 운행 중 일어난 이 사건은 업무상 재해일까.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장낙원)는 운전기사의 가족들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개인적인 관계에 주목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없다”고 27일 밝혔다.

2017년 3월 25일 강모(여·당시 51세)씨가 운전 중이던 서울 시내버스 603번에 오모(당시 55세)씨가 탔다. 오씨는 기사 강씨와 10년 전쯤 동거했다 헤어진 사이였다. 오씨는 여러차례 강씨를 찾아가 대화를 하자고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씨는 휘발유와 라이터를 준비해 강씨가 운행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탄 오씨는 운행 중인 강씨와 말다툼을 벌였다. 종점이 가까워질수록 승객들은 하나 둘 내렸고, 차고지 가까이에 오자 버스에는 오씨와 강씨만 남게 됐다. 오씨는 “한 시간만 진지하게 대화를 하자”고 말했지만 강씨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씨는 휘발유를 강씨의 몸에 들이부은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강씨는 이 사고로 전신 80%에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다 일주일쯤 뒤 숨졌다. 오씨는 현존자동차방화치사죄로 징역 25년을 확정받았다.

유족들 ”승객 골라 태울 수 없다”

숨진 강씨의 가족들은 근로복지공단과 산업재해보상보험심사위원회에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지 못하자 법원에 소송을 냈다. 유족들은 이 사건 범행이 버스 기사 업무에 내재된 위험이 현실화된 사고라고 주장했다. 강씨는 정해진 버스 노선에 따라 운행했고, 오씨가 버스에 타려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버스회사 측에서 버스 운전석에 탈출구를 마련했거나 승객과 기사를 완전히 분리하는 격벽시설을 만들었다면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법원 “사적인 관계 때문에 생긴 사고”

법원도 강씨가 승객의 탑승을 거부할 수 없었고, 버스 운행 업무 중 승객에 의한 폭행 사건이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럼에도 “오씨의 범행이 통상 버스 기사들의 직무에 내재하거나 수반되는 위험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오씨가 개인적인 원한에 따라 계획적으로 사건 범행을 준비한 것이므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버스회사가 탈출구나 격벽시설을 설치해야할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유족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격벽시설이 있었다면 강씨가 사망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면서도 “사건 당시 버스가 관련 법령에서 정한 보호봉이나 격벽시설 요구 수준에 못 미쳤다고 볼만한 증거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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