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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길 벼랑의 꽃을 따며 부르는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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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

미국 유학을 시작하며 우선 좀 놀란 건 어떤 광활함이었다. 남북한으로 단절된 분단의 시공간에서 살아온 탓일까. 천둥소리와 빗방울마저 크고 굵고 넓었다. 본격적인 놀람은 말(이야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그 자유로움과 포용력, 말을 귀하게 대접하는 것이 그랬다. 말은 개인의 인격·소양·신뢰·매너·카리스마를 평가하고 공동체의 역동성과 통합력을 대변하는 기준이었다.

특히 정치인을 포함하는 공인의 말은 자격·리더십·전문성·공신력·지혜·예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였다. 말은 개인·조직·공동체·시대를 견인하는 가치이고, 동시에 무한책임을 져야하는 속박이었다. 말에 대해 방대하고 다양한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결과는 어릴 때부터 교육과 실습을 통해 세대로 계승된다. 당연히 개인과 집단과 공동체의 민주적 발전에 활용되고, 스토리로 축적되어 생활이 되고 문화가 된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도 말은 경영 못지않은 중요한 요소로 취급된다. 말로 전해지는 스토리는 창업주와 창업정신, 기업의 개척·발전·경쟁·위기·사건·사고·비밀에 대해 사람의 냄새를 담은 살아있는 소중한 정보로 이해한다. 공식 기록물이 전할 수 없는 정체성·소속감·만족감·희생정신·협력심·주인의식을 높이는 자산이고 수단이다.

소통카페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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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우리 사회도 말과 스토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추세다. 지방자치제가 생긴 후에 지역의 장소와 행사에 스토리를 입히는 일이 부쩍 늘었다. 예를 들어 내 고향 강릉의 ‘헌화로’가 그런 경우다. 신라 성덕왕 때의 4구체 향가 ‘헌화가’(『삼국유사(권2)』)를 담고 있다.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남편 순정공의 행차를 따르던 절세미인 수로부인은 천길 절벽에 핀 예쁜 꽃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꽃 따오는 일은 목숨이 위태롭기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백발노인이 그 꽃을 따다 바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먼 신라, 수려한 바닷가, 천애의 낭떠러지, 붉디붉은 꽃, 아름다운 여성, 나이를 초월한 열정의 남성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서 다시 태어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공생적 교감의 평화로운 공동체 이야기를 전한다.

별 설명도 없이 ‘100년 집권’과 260개 의석 확보를 거론하면서 “도둑놈들에게 정권을 맡길 수 없다”고 한 여당 대표의 말이나 “다이너마이트를 빼앗아 문재인 청와대를 폭파하자”는 야당 의원의 말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의민주주의를 모욕하는 것이다. 대통령을 ‘한센병’, 야당대표를 ‘사이코패스’, 생각이 다르면 ‘괴물’로 빗대는 말도 마찬가지다. ‘문맥을 고려하면 그런 뜻이 아니다’라는 정치인들의 한결같은 변명에는 기가 막힐 뿐이다. 당파적 정쟁으로 온 나라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가는 말의 행진에 상식으로 살아가는 국민들은 속이 타들어 간다. 일부 과거를 내세우며 현재와 미래를 재단하는 여야 정치인과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의 후안무치에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다. 목숨을 걸고 벼랑의 꽃을 따는 이야기 공동체가 그립다. 국민들을 내편 네 편으로 내몰지 않는 품격과 통합의 비전을 담은 말이 그립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소통하고 공존하는 봉합과 포용의 광활한 말이 그립다.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