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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원 해킹에 책임 느낀 파견 직원 극단 선택…"업무상 재해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우울증에 걸렸고, 우울증이 자살의 원인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업무와 자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함부로 결론낼 수는 없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장낙원)는 한국수력원자력에 파견돼 컴퓨터 유지관리업무를 하다 2016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모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김씨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다고 26일 밝혔다.

김씨는 2000년 한 정보·통신회사에 입사해 2008년부터 한수원에 파견됐다. 김씨는 컴퓨터 유지관리 업무 등을 맡았다. 그러던 2014년 12월 한수원 해킹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해킹 조직이 한수원 직원에게 이메일로 허위 입력창을 보낸 뒤 비밀번호를 입력하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료를 빼내 한수원 원자력발전소 도면 등의 정보가 유출됐다.

김씨는 이 사건 이후 우울증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김씨 업무 특성상 외부로부터 컴퓨터 파일을 받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자신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해킹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김씨는 대학병원 정신의학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었다.

수사기관 조사에서 김씨 책임이 아니란 점이 밝혀져 감에 따라 김씨의 우울증 증상은 호전됐다. 그런데 2015년 9월 한수원이 경주로 이전하는 계획이 확정됐고, 협력업체 직원이었던 김씨도 2016년 5월부터 경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됐다. 2016년 3월 말부터 김씨는 가슴 두근거림과 불면증을 호소했고 다시 우울증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해 4월 김씨는 집 근처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법원은 김씨가 해킹 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껴 우울증을 앓았고, 이후 우울증이 재발해 자살에 이르게 된 정황은 인정했다. 하지만 “수사기관 조사에서 해킹사건 책임자로 지목돼 수사를 받았다거나, 회사가 김씨에게 책임을 추궁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김씨가 사망하기 전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받은 심리진단서 내용도 참고했다. 당시 감정의는 김씨에 대해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고, 평소 불안 수준이 높고 예민한 사람”이라고 진단했다. 또 법원은 “김씨가 지방 발령으로 심리적 부담을 느낀 점은 인정하지만 그 부담감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썼다.

재판부는 “자살이 사회평균인 입장에서 보아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우울증에 따른 것이 아닌 한 자살과 업무 사이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히며 김씨 유족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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