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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소니 워크맨과 물개 로봇 파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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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1980년대 초 한쪽 허리에 워크맨을, 다른 쪽 허리에 건전지를 차고 걸어 다니면서 음악을 들었다. ‘돌아온 장고’ 영화처럼 쌍권총을 차고 다니는 모양새였다. 집에서 커다란 전축에 LP판을 올려놓거나 카세트 라디오로 음악을 들을 때라 ‘휴대용 카세트’인 워크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워크맨에 열광했다.

일본은 실버시장 대비해 연구개발 #한국도 4차산업혁명 초점 잡아야

일본 소니는 79년 카세트 형식의 워크맨을 처음 출시해 90년 시가총액이 2조 9000억엔으로 6.6배가 됐다. 소니를 필두로 일본 전자회사들은 80년대에 세계 정보기술(IT) 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90년대엔 미국 디지털 기업들이 지배하면서 워크맨은 2010년 단종됐다. 일본 IT 기업들은 상위권에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보는 일본의 겉모습이다. 이면에 다른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의 고령사회 진입(1994년)을 3년 앞둔 91년 출시된 애니메이션 ‘노인 Z’에 와병 노인을 간호하는 인공지능(AI) 로봇이 등장한다. 지금 봐도 기발하다. 구상은 80년대에 했을 텐데 그 당시 이런 생각을 일본사회에서 하고 있었다니 놀랍다.

소니는 자산 버블이 붕괴하던 93년에 애완용 ‘로봇 개’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99년 아이보(Aibo)를 처음 선보였다. 이후 2003년까지 연이어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다가 2006년에 생산을 중단한다.

소니는 10년 이상 잠류(潛流)의 세월을 보내다 2017년 AI를 탑재한 새 아이보 모델을 발표했다. 지금 아이보는 빅데이터·사물인터넷 등의 발전과 함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소니가 ‘로봇 개’ 프로젝트를 시작할 즈음 일본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는 아기 하프물범(Harp Seal) 모양의 로봇 개발을 시작했다. 10여년에 걸친 연구개발 끝에 2004년 애완용과 치료를 겸하는 로봇인 파로(Paro)를 내놨다. 초고령사회 진입 2년 전이었다. 치매 환자 치료 목적으로 개발했는데, 우울증·인지장애·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의 증상을 완화해주는 데도 유익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지금도 세계 30여 개국 병원과 요양시설에 보급돼 치료 관련 글로벌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아이보 출시 때 한 기자가 소니 최고경영자(CEO)에게 고령사회인 일본의 실버 시장을 겨냥해서 개발했느냐고 물었다. 그 CEO는 일본 시장을 겨냥한 건 당연한 얘기고, 이를 넘어 중국의 거대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답했다. 2050년까지 지구촌에서 60세 이상 인구가 11억명 증가하는 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65%를 차지할 전망이다.

한나라 때 장건(張騫)이 황하를 묘사한 적이 있다. 곤륜산에서 발원한 황하 물줄기가 염택(鹽澤)이라는 광야에서 자취를 감추고 땅 밑에서 몇천리를 잠류하다가 갑자기 솟구쳐 올라 도도한 기세로 8800리를 가서 바다로 흘러간다는 내용이다. 고령사회를 겨냥한 일본의 로봇산업이 잠류의 세월을 보내고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80년대 세계 젊은 베이비 부머들이 워크맨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면, 이제는 은퇴해 노년에 접어든 베이비 부머들이 물개 로봇 파로를 하나씩 안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고령사회와 4차 산업혁명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미래의 모습이다.

한국은 은퇴한 지구촌 베이비부머들에게 무엇을 안겨줄 준비를 하고 있나. 벤처산업과 4차 산업혁명을 육성해야 한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다. 다른 나라들은 방향을 잡은 것 같다. 독일은 기존 산업에 AI를 탑재하고, 일본은 로봇과 헬스케어, 중국은 로봇과 바이오, 미국은 플랫폼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냥 세계적인 벤처기업을 만들라는 주문은 야구 감독이 매번 홈런 사인만 주는 거나 마찬가지로 허무하다. 지금이라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김경록 미래에셋 은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