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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과거 돌부리’가 ‘미래 발목’ 잡지 않도록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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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일본 의회 관련 위원회가 앞으로 한국과의 관계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강경조치 검토를 끝냈다. 한국 경제계와의 교류 역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본다.” “최근 한·일 관계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일본의 친한파 전문가들조차 한국을 비난하는 기고문을 내고 있다.”

한·일 갈등은 양국 모두에 손해 #감정보다 국익을 먼저 고려해야

일본 소식에 정통한 언론인들이 전한 이야기를 필자가 최대한 정제해봤다. 대화 내내 답답했지만, 탈출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역사가 거꾸로 흘러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문제가  간단치는 않다. 한·일 협정, 한·일 국교정상화,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 과거 수차례 양국이 합의했지만, 논란과 갈등이 반복되는 것은 사안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도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사과를 주저하고,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한국 기업이나 경제에 줄 피해도 걱정이다. 지난해 말 일본 닛케이 신문이 한·중·일 3국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일본 기업인 응답자의 53%는 향후 한·일 관계가 악화할 것으로 봤고, 69%는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한국 대법원 판결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한국과 거래하는 일본 기업인들의 인식이라 염려된다.우리 경제가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국이 일본에 의존하는 부문이 많다. 특히 반도체 등 핵심산업에서 그렇다. 한국의 주요 대일 수입품목은 반도체 제조장치 및 부품, CPU 메모리 등 집적회로, 정밀화학 원료, 다이오드·태양전지 등 한국 주력산업의 필수요소들이다. 혹여 경제제재라도 가해진다면 한국경제에 끼칠 파장이 클 수 있다.

한·일 관계가 계속 경색될 경우 제조업뿐만 아니라 금융 부문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일본 기관투자자들이 한국에 투자한 자금을 회수할 경우 글로벌 신용평가사나 금융시장이 한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 신호로 판단해 외국인 자금이탈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관계에서 최우선 고려할 사항은 감정보다는 국가이익이다. 국익 관점에서 볼 때 지금 한·일 관계는 득보다는 실이 너무나 크다. 다행히 단교를 언급하기에는 양국 관광객 통계 등 수치상으로는 여전히 친밀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인 관광객 292만명이 한국을 다녀갔다. 전년 대비 28.1% 증가했다.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753만명으로 전년 대비 5.6% 증가했다. 일본에서 한국인은 지난해만 약 6조 원을 소비했다.

“양국 정상은 한·일 양국이 21세기의 확고한 선린 우호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선 과거를 직시하고 상호이해와 신뢰에 기초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의견 일치를 봤다.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금세기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의 역사 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1998년 10월 8일, 일본 도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가 서명한 ‘21세기 한·일 새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한 대목이다. 답답한 마음에 찾아본 공동선언에서 ‘미래지향적’이란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미래’를 위해 오부치 총리의 사과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때로는 돌부리 옆으로 살짝 피해 가는 것이 현명할 때가 있다. 진보(進步)란 그런 것일 텐데 말이다.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