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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속마음을 보여주는 기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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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입이 걸다. 이를 만방에 알린 건 꺼지지 않은 마이크였다. 2008년 G8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말했다. “헤즈볼라가 X 같은 짓(shit)을 그만두게 해야 해.” 부시 대통령이 비판적인 기자를 보고 “멍청이(asshole)”라 되뇐 것도 마이크 때문에 들통났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제시 잭슨 목사를 공격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잭슨 목사가 경쟁자를 지지했다는 소식에 “더러운 배신이다. 등 뒤에서 칼로 찔렀다”며 발끈한 게 마이크에 잡혔다. 왕년의 축구 스타 마라도나도 마이크에 딱 걸렸다. 2016년 한 행사장에서 펠레가 물었다. “메시는 어떤 성격이야?” 마라도나는 메시를 깎아내렸다. “리더로서는 아니에요.”

국내에서는 2016년 당시 정세균 국회의장이 ‘맨입 사건’을 일으켰다. 어느 장관 해임안을 놓고 여·야가 부딪혔을 때, 야당 소속인 정 의장이 중얼거린 게 마이크를 통해 누설됐다. “세월호 조사 연장이나 어버이연합 청문회 중에 하나 내놔야지, 맨입으로는 안 돼.” 조사 연장 등과 장관 해임을 맞바꾸자는 정치거래 시도로 해석됐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천정배 의원을 욕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미친 X.” 마이크는 작은 소리를 여지없이 잡아냈다. 해명은 애매했다. “국회의원에게 그렇게 말할 의사, 다시 말해 미필적 고의는 없었다.”

엊그제는 마이크 때문에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구설에 올랐다. 정책 문제가 전부 관료 탓이라고 투덜거린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번에도 미필적 고의는 아니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마이크 덕에 “결코 내 탓은 아니다”라는 속마음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었다. 신통방통한 마이크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