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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의 적자생존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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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네 번 근무하며 종국엔 정책실장까지 지낸 경제 관료 출신이 5년여 전 말했다.

“공무원 최고의 무공(武功)이 완성된 시기가 있었다.”(『덫에 걸린 한국경제』)

공직에 대해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하던 YS(김영삼) 정부를 두고서였다. 그는 “YS 정부의 관료에 대한 강한 불신에 관료들은 꼼짝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복지부동(伏地不動), ‘낙지부동’ 같은 유행어가 만들어진 게 이때”라고 했다. 낙지부동은 낙지처럼 빨판을 붙이고 아무 데나 딱 붙어있다는 의미다.

완성이라니, 그가 동료들을 과소평가했다. 노무현 정부 땐 눈치는 본다는 의미로 ‘복지안동(眼動)’, 박근혜 정부에선 지시를 받아적고 그대로 이행한다는 ‘적자생존’으로 진일보했다.

현 정부도 훌륭한 도량이다. 우선 적자생존의 진화다. 누구의 지시인지 기록해두는 술법으로다. 실무자까지 처벌한 적폐청산을 보며 체화한 기술이다. ‘녹(錄)자생존’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묵언 정진도 있다. “청와대가 밀어붙이는 구조라 공무원이 할 게 없는 데다 얘기해도 안 들으니 말도 안 한다”(또 다른 관료)는 것이다.

최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관료들을 질타했다는 보도를 보며 떠올린 무공 소사(小史)다. 이 원내대표가 “관료가 말 덜 듣는 것, 이런 건 제가 다 해야…”라고 하자 김 실장이 “그건 해주세요”라고 답했다는 대목에선 장차 더한 경지도 가능하겠다는 느낌이다. 여당이 관료들을 여의도로 자주 부르겠다는 얘기일 터인데, 정부에선 세종시로 이전한 부처는 웬만하면 세종시에 머물라고 지시한 상태다. 축지법이라도 익히려나.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관료들을 움직이게 하라고 했더니 진짜 움직이게만 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