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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아티스트 져드, 콩잎장아찌 ‘미니멀’과 통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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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호 26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 끼

주한미군으로 복무한 미니멀 아트의 세계적 대가 도널드 져드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개인전도 열었다. 하회마을, 병산서원 등을 둘러봤던 그는 논문에서 한국의 풍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사진 중앙포토]

주한미군으로 복무한 미니멀 아트의 세계적 대가 도널드 져드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개인전도 열었다. 하회마을, 병산서원 등을 둘러봤던 그는 논문에서 한국의 풍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사진 중앙포토]

1991년 5월 6일 서울 인공화랑에서 도널드 져드(1928~94)의 개인전이 열렸다. 미니멀 아트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져드의 개인전이 아직 세계미술계의 변방이었던 서울에서 열린다는 소식은 국내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46년 미군 공병으로 한국 근무 #귀국 뒤 미니멀 아트 중심 작가 돼 #윤형근·야마구치·황현욱 3각 인연 #91년 서울 인공화랑서 져드 개인전 #이듬해 방한 땐 안동 하회마을 찾아 #온돌방에 묵으며 소박한 밥상 즐겨

알고 보니 져드는 한국과 인연이 깊었다. 해방 직후인 46년 10대 후반의 나이였던 져드는 미군 공병으로 한국에서 1년간 근무했다. 그는 한국인 인부들과 함께 미군부대의 용광로를 만들기도 했다. 이듬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져드는 뉴욕 컬럼비아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는 한편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회화도 함께 공부했다. 이후 미술평론과 창작활동을 병행했다.

져드 말고도 미국의 미니멀 아트 작가들 중에는 한국에서 청춘을 보낸 이들이 몇 명 더 있다. 6·25전쟁 때 참전한 솔 르윗(1928~2007), 휴전 이후 오산비행장에서 근무한 댄 플래빈(1933~96)은 한국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60년대 이후 미니멀 아트의 중심작가로 등극했다. 도널드 져드는 아들 이름을 플래빈 져드로 지을 정도로 댄 플래빈을 좋아했다. 이들이 모이면 가끔 청춘의 한국을 떠올리곤 했다. 져드는 환갑을 넘겨서야 전시회를 계기로 10대 청춘의 빛나는 한때를 보냈던 서울로 되돌아올 수가 있었다.

솔 르윗, 댄 플래빈도 한국서 청춘 보내

1991년 5월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열린 도널드 져드 전시회 오프닝. 왼쪽부터 김승덕· 도널드 져드· 야마구치 다카시·박서보·윤형근·황현욱. [사진 김춘화]

1991년 5월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열린 도널드 져드 전시회 오프닝. 왼쪽부터 김승덕· 도널드 져드· 야마구치 다카시·박서보·윤형근·황현욱. [사진 김춘화]

져드의 개인전이 서울에서 열릴 수 있었던 것은 화가 윤형근(1928~2007), 일본 야마구치화랑 대표 야마구치 다카시(1948~), 인공화랑 대표 황현욱(1948~2001), 이 세 사람의 인연이 엮어졌기 때문이다. 오사카의 야마구치화랑은 89년에 져드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야마구치는 같은 해에 윤형근의 일본 전시회를 유치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하면서 윤형근과 친해졌다. 윤형근은 자신이 아끼던 황현욱이 88년 서울에서 인공화랑을 설립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황현욱은 미니멀 아트를 좋아했다. 어떡하든 미니멀 아트의 최고봉인 져드의 전시를 인공화랑에서 열고 싶었으나 그의 능력으로선 요령부득이었다. 마침 윤형근의 전시를 기획한 야마구치화랑에서 져드의 전시가 열린 걸 안 황현욱은 윤형근에게 야마구치를 설득하여 져드전이 서울에서도 열릴 수 있도록 부탁했다.

윤형근의 설득으로 야마구치는 져드의 서울 전시를 결심했다. 져드와 신뢰가 두터운 야마구치의 주도하에 인공화랑에서 져드전이 열리게 됐다. 전시를 위해 져드와 그의 작품설치전문팀이 서울을 찾아왔다. 야마구치도 서울을 찾았다. 윤형근, 박서보, 이일 등 국내의 여러 미술인이 오프닝 파티에 참석했다. 져드는 층고가 6m에 육박하는 인공화랑의 시원하고 대담한 건물디자인에 감동했다. 그 디자인을 다름 아닌 황현욱이 직접 했음을 알고는 더 감동했다. 져드의 칭찬에 황현욱도 고무됐다. 1928년생 동갑인 져드와 윤형근은 보자마자 의기투합했다.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 준 전시였다.

이후 져드는 일본의 화랑과 미술관의 전시를 틈타서, 또 윤형근을 만나기 위해서 서울을 몇 번 더 찾았다. 윤형근의 제안으로 져드는 한국 한지를 이용한 목판화작업도 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점점 깊어져 93년 뉴욕 도널드 져드 파운데이션에서 윤형근의 전시가 이루어졌다. 져드의 초대로 세계적인 일류 미술인들이 참석하여 윤형근의 전시를 축하해 주었다. 후배 황현욱의 염원인 져드의 전시를 위해 경제적 희생마저 감수한 윤형근의 선의는 뉴욕에서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져드는 한국이 친근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10대의 한 시기를 한국에서 보낸 그다. 한국의 산하가, 한국의 음식이 낯설지 않았다. 10대 때 본 한국은 참담한 모습이었지만 60대가 되어 다시 찾은 한국은 풍요롭고 여유가 있었다. 그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져드는 황현욱과 인공화랑의 직원들, 그리고 한국의 미술인들과 서울 시내와 근교를 쏘다녔다.

져드의 작품 ‘무제’(1992). [사진 국제갤러리]

져드의 작품 ‘무제’(1992). [사진 국제갤러리]

92년 1월 27일 서울을 다시 찾은 져드는 2월 1일 서울을 떠나기까지 남한산성, 인사동, 민속촌 등을 다녔다. 민속촌에 가서는 초가의 국밥집 온돌방에서 소고기국밥을 먹었다. 방구들의 뜨거움을 피하느라 다리를 번갈아 반대 방향으로 꼬아야만 했다. 뚝배기 속의 무, 콩나물, 소고기가 몹시 뜨거웠다, 국물은 얼큰하며 칼칼했다. 져드는 맵다 하면서도 소고기국밥을 행복한 표정으로 먹었다. (당시 인공화랑 스탭 윤경미의 수첩에서 인용)

이해 가을 져드는 서울을 또 방문했다. 황현욱은 자신의 콩코드 승용차에 져드를 태우고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하회마을이었다. 박현기, 이교준, 권오봉, 신용덕 등 대구에서 온 황현욱의 동료 미술인들이 합류했다. 져드는 안동 시내의 호텔이 아닌 하회마을 민가에서의 식사와 잠자리를 원했다.

마을 이장으로부터 소개받은 풍산 류씨 문중의 소박한 집이 져드의 숙소가 됐다. 노인들만 사는 집이라 저녁 상차림이 쉽지 않았다. 문중의 잡사를 맡던 옆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차린 저녁상인지라 평소에 먹던 서민의 반찬이 그대로 나왔다. 안동 간고등어 같은 별식은 없었다. 안동 사투리로 곤짠지라 불리는 꼬들꼬들한 무말랭이장아찌, 산초장아찌, 김치 등 저장식품이 반찬으로 나왔다.

삭힌 콩잎장아찌가 나왔을 때 져드는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경상도 사람들은 왜 낙엽을 반찬으로 먹는가 하고 서울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마련인 콩잎장아찌였다. 서울사람에게도 뉴욕의 져드에게도 콩잎장아찌가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콩잎장아찌 한 이파리를 들어 흐린 백열등 불빛에 비추어 가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영양분을 담을 만한 최소한의 두께마저 탈거되고 거친 엽맥에 관념에 가까운 얇은 막만이 간신히 걸쳐진 상태의 이파리였다. 식도를 거쳐 위로 들어가서 포만을 약속하는 물질이라기보다는 눈에서 정신으로 흡수되어야 할, 극한의 빈약함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정신성의 어떤 지극한 경지였던 것.

경북 내륙에는 재료의 빈약함에 유교의 정신성이 더해져 지나치게 화려하게 먹는 걸 멀리하는 문화가 있다. 재료의 빈약을 정신의 숭고로 역전시키는 문화다. 져드가 추구했던 미니멀리즘도 최소한의 장소성을 역전시켜 최대한의 공간성을 끌어내는 작업이 아니었던가. 흐늘흐늘 얇게 삭은 콩잎장아찌 한 이파리에서 그가 평생을 추구했던 미니멀리즘의 새로운 국면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병산서원 만대루 등 한국 풍수에 감회

식사를 마친 일행은 안동 시내로 나왔다. 하회마을에는 져드 혼자 남았다. 군불을 지피자 방바닥이 따뜻해졌다. 가을밤의 차가운 바람이 낡은 문종이를 뚫고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자리에 눕자 10대 때 처음 맡았던 동북아시아의 흙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다음날 져드는 황현욱 일행을 만나 근처의 병산서원을 찾았다. 경북 내륙에는 서원이 많고 강을 따라서 누각문화가 발달했다. 서애 류성룡을 추모하는 병산서원에는 누각 만대루가 있다. 만대루를 오르면 흰 모래밭을 적시며 흐르는 유장한 낙동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져드의 치나티 파운데이션이 자리한 텍사스 말파의 황량한 사막과는 정반대의 산자수명한 풍경이었다.

져드는 깊어 가는 가을의 싸한 공기를 천천히 호흡하며 낙동강을 바라다보았다. 져드의 작품처럼 오직 수직과 수평이라는 최소한의 구조로 지어진 만대루는 콩잎장아찌만큼이나 헐렁하고 허전하게 비어 있었다. 비어 있음을 통해 공간성과 정신성을 극대화했다. 병산서원은 국가 지원의 사액서원이 아니었다. 입신양명과 현실의 풍요로움을 배격하는 대신 정결한 수신을 통해 엄정한 정신성을 극한으로 부풀려야 한다. 만대루는 이런 기풍과 학풍의 표상이었다. 져드는 죽음을 앞두고 쓴 마지막 논문에서 한국의 풍수를 언급했다. 삭힌 콩잎장아찌를 닮은 헛헛한 만대루에서 가졌던 이날의 감회를 떠올리게 하는 짤막한 유언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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