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배명복칼럼

불행 재촉하는 김정일의 오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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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사일 도박에 부시 끄떡 안 해

그녀는 말한다. 원칙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남자가 불행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일본어로 글을 쓰며 도쿄의 지가(紙價)를 한창 올리던 1989년, 그녀는 남자에 대한 단상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에세이집 '남자들에게'다. 나름대로 시대를 선도(先導)한다고 폼을 잡는 '잘난 남자'들에게 던진 통쾌한 도전장이다. 그중 한 토막이 '불행한 남자론'이다.

소신과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그 자체로 훌륭한 자세라는 점은 그녀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기 때문에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 보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원칙만을 밀고 나가는 것은 스스로 불행의 묘혈(墓穴)을 파는 바보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권한다. 불행을 피하려면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라고. '역지사지(易地思之)'다.

북한이 결국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강행했다. 국제사회의 간곡한 만류와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보란 듯이 발사 버튼을 눌러 버렸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그것도 미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시점에 맞춰 무려 7발의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세기의 불꽃놀이'를 벌인 것이다. 포토맥 강변의 독립기념일 폭죽을 무색하게 한 그 불꽃은 화려했을지 몰라도, 그것은 김 위원장의 불행을 재촉하는 운명의 신호탄이었다.

국제법적으로 미사일 발사를 규제할 명분이 없는 데다 설사 쏘더라도 미국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계산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선군(先軍)정치와 강성대국 원리주의에 빠져 상대의 처지에서 냉정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지금의 백악관 주인은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했던 1998년의 빌 클린턴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 보는 사람이다.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이고, 수십만 명의 정치범을 수용소에 가둬 놓고, 위조 달러를 찍어대고, 핵과 미사일이라는 대량살상무기로 남을 위협하는 김정일 정권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악의 화신'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위협에도 꿈쩍할 사람이 아니다. 대포동 미사일을 쏘고 나면 '악행(惡行)에는 보상 없다'는 원칙을 접고, 부시가 협상 테이블로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면 역지사지를 수박 겉핥기로 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남한의 입장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가뜩이나 퍼주기 논란에 휩싸여 있는 터에 미사일 쇼크까지 덮쳤으니 노무현 정부로서는 북한을 도와주려야 도와줄 방법이 없다. "대포동 2호가 위성 발사체일 수도 있다"는 남한 정부 당국자의 발언에서 용기를 얻었다면 번지수를 잘못 읽은 것이다. 남한은 북한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다.

남한도 중국도 도울 길 없어

중국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중국이 버팀목이 돼줄 거라고 봤다면 오판한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미.일의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의 가속화로 이어질 것이고, 이에 대응해야 하는 중국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물밑 중재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데 따른 배신감 또한 두고두고 북한에 부담이 될 것이다.

'벼랑 끝 전술'의 미망(迷妄)에 빠져 역지사지를 제대로 못함으로써 김 위원장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에 들어섰다. 문제는 그 불행이 혼자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헐벗고 굶주린 2500만 북한 주민 전체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데 비극이 있는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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