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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정부의 잘못, 빅데이터는 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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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윤석만 교육팀 기자

윤석만 교육팀 기자

“민심은 공론이며 하늘의 뜻과 같다.”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추앙받는 율곡 이이(李珥)는 1574년 선조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제목의 상소문을 올렸다. 한자로 1만2000자가 넘는 장문의 글에서 조선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지금의 시사(時事)는 날로 그릇되고 백성들의 기력은 매일 소진되고 있습니다. 이는 권세 있는 간신들이 세도를 부렸을 때보다 심합니다. 이대로 가면 10년이 못 돼 화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거리낌 없이 의견을 받아들이십시오.”

당시 조선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 허구한 날 당파 싸움을 벌였다. 1591년 함께 일본을 정탐하고 돌아온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 준비 중’이라고 보고했지만 동인 김성일은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조는 집권세력이던 동인의 말을 받아들여 짓고 있던 성조차 축성을 그만두고 안일하게 대처했다.

조정은 전쟁이 코앞인 위기 상황도 평화라고 우길 만큼 지록위마(指鹿爲馬)에 빠져 있었고, 선조는 충신의 직언과 백성의 민심을 읽을 안목이 없었다. 이이는 죽기 2년 전(1582년) ‘진시폐소(陳時弊疏)’라는 상소문에서 ‘200년 역사의 나라가 2년 먹을 양식이 없다. 더는 나라가 아니다’고 했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한양은 침공 20일 만에 함락됐다.

지난주 보도한 ‘불안한 대한민국’ 시리즈는 2017년 7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빅데이터 1억2000만 건을 토대로 했다. 국가미래연구원과 타파크로스가 언급량이 가장 많았던 이슈를 분석해 키워드를 뽑아내고 그 안에 담긴 민심의 방향을 추적했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매우 ‘불안’하며 시민들은 ‘안전’과 ‘공정’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제든 ‘묻지마’ 범죄와 몰래카메라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미세먼지로 숨 쉴 자유조차 박탈당한 일상이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주거·일자리 등 불안정한 민생도 삶의 전반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빅데이터에 드러난 ‘소득주도성장’을 다룬 기사엔 6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릴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그러나 이런 ‘불안’의 근본 원인은 힘든 현실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우리보다 자식세대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어서다.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당파싸움에만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광두 서강대 석좌교수)

시민들은 촛불로 탄생한 정부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주길 원했다. 그러나 빅데이터 조사에서 ‘불공정’ 연관어가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비슷하게 나온 것처럼 현 정부 또한 적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적폐와 싸우다 신 권력층이 되는 모습도 보였다.(김형준 명지대 교수)

빅데이터는 민심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현 정부가 ‘내로남불’로 또 다른 적폐가 되지 않으려면 정확히 민심을 읽고 비판도 거리낌 없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대통령의 근거리 보좌진들은 “나라에 이롭다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로 목을 잘라도 피하지 않겠다”는 이이처럼 직언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 민심 그대로 간언할 이가 몇이나 될까. 남아있는 문재인 정부 3년의 성패는 그 숫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석만 교육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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