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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만들기] 19. 청계천 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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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복개도로도 뜯겨지고 있다.

1958년 9월 착공된 청계천 복개공사는 61년 12월 광교에서 오간수교(동대문) 간 1단계가 완공됐다. 이후 반세기 동안 서울 시민은 땅 속 청계천만 알고 있다.

청계천은 인왕산.북악산 남쪽 기슭과 남산 북쪽 기슭에서 각각 발원한 두 물줄기가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그러나 고려 말까지는 장마나 홍수 때 외에는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 이름뿐인 하천이었다. 조선 태종은 재위 11년(1411년) 말 개천(開川)도감을 설치, 5만명의 군졸을 동원해 개천 굴착공사를 벌였다. 인공하수도 조성 공사였던 셈이다. 세종 .영조 등도 보수.준설작업에 힘을 쏟았다. 개천의 용도가 인공하수도였으니 물이 깨끗할 수가 없었다.

조선 5백년 동안 많은 빈민이 개천변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오물을 버렸다. 시체까지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는 70만명이 넘는 일본인을 조선에 이주시켰다. 서울에 정착한 17만명(42년 기준)의 일본인 중 대다수가 개천 남쪽 지역에 살았다.

일제는 일본인 밀집 거주지인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수시로 개천을 준설하면서 보통명사 개천에 '청계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청풍계천(淸風溪川)의 줄임말이라는 것이다. 그 뒤 물이 맑아져 아낙네들이 개천에서 빨래를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러나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등으로 준설이 어려워지자 청계천의 수질은 다시 나빠졌다.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군수물자 수송도로 건설에 열을 올렸다. 서울에서는 청계천을 복개해 도로를 넓히는 계획을 세우고 42년 광화문우체국 앞~광통교 구간을 복개했다.

광복 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청계천은 썩은 하천이 됐다. 하천 바닥에는 오물과 흙이 쌓이고 주변은 판자촌을 이뤘다. 동대문에서 동쪽으로만 들어서던 판잣집이 청계천 3,4가까지 다닥다닥 늘어났다. 주민의 배설물이 하천 바닥에 그대로 흘러들어 악취를 풍겼다.

자유당 정권 말기 허정 서울시장은 청계천을 복개하기로 했다. 시 재정 부족으로 58년부터 매년 조금씩 공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5.16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공사를 서둘러 61년 1단계 청계천 복개 준공식을 열었다. 이어 청계천 복개공사는 오간수교에서 동쪽으로 진행되다가 70년대 초 마장동에서 마무리 됐다. 청계천 지류인 중학천.청운천.오장천.성북천 등도 모두 복개됐다.

더러운 물이 안 보이고 악취가 사라진 복개된 청계천에 영향을 받아 부산.대구.광주 등 지방도시의 개천도 거의 대부분 복개돼 도로나 주차장으로 쓰였다. 경주와 남원은 읍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垓字)마저 복개해 버린 기막히는 일도 벌어졌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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