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터 논넨마허 특별대담] "일방주의에 의한 국제질서 재편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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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세계적인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발행인 귄터 논넨마허 박사가 중앙일보 유재식 문화담당 부국장과 대담을 하고 9.11 사태 이후 급변하는 세계질서의 재편과 이라크 파병 문제, 한반도 통일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제8회 아시아-유럽 프레스 포럼에 참가하고 있는 논넨마허 발행인은 "새로운 세계질서는 한 국가의 힘이 아니라 여러 국가의 합의에 의해 창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편집자]

▶유재식 부국장=9.11 사태로 인한 테러와의 전쟁은 아직 진행형이다. 이로써 세계는 크게 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전개를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로 볼 수 있을까.

▶논넨마허 발행인=이는 문명 간의 충돌이 아니라 국제 테러리즘의 문제다. 이슬람권 사람들은 서구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져왔다. '약자의 무기'인 테러가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자행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문명 간 충돌의 결과는 아니다. 종교 간의 충돌은 더욱 아니며, 지난 1백년간 서구와 이슬람권 사이에 있었던 '경험의 충돌'일 뿐이다.

▶유=어제의 적이 오늘 동지로 바뀌는 등 구(舊)세계의 세계질서가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논넨마허=며칠 전 판문점을 방문했을 때 구세계 질서의 잔재를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 동.서 냉전시대의 '동(東)'이 사라졌다. 따라서 서방이라는 개념도 자연스레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이 지금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전한 것을 보면 부국과 빈국을 구분하던 남북의 의미도 희미해졌다. 지금은 한마디로 무질서의 세계다.

*** 유럽합중국 10년 내 힘들 것

▶유=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쨌든 세계는 지금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논넨마허=한마디로 단정키 힘들지만 지금 세계질서는 두가지 축으로 형성돼 가고 있다. 하나는 미국이 만들어내는 질서며, 다른 하나는 여러 나라의 협조체제로 형성되는 유엔에 의한 질서다. 분명한 것은 미국처럼 하나의 국가가 세계질서를 만들어서도 안 되고 만들 수도 없다.

▶유=여러 면에서 미국은 로마제국과 비교된다. 미국은 과연 '21세기 로마제국'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가.

▶논넨마허=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기술과 통신이 발달한 오늘날은 로마시대와 비교할 수 없다.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이 제국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여기에 일부 동조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체는 아니다. 대부분의 현명한 미국 사람은 제국주의적 질서를 원치 않는다.

▶유=유럽에 말만 있고 행동이 없다는 비아냥이 있다. 정치.경제.군사적 의미에서 미국에 필적하는 유럽합중국을 기대할 수 있나.

▶논넨마허='유럽합중국'이 10~15년 내에는 어려울 것이다. 유럽연합(EU)의 동유럽 확대로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이라크전과 관련한 영국과 프랑스.독일 간의 견해차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유=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독일을 적극 지원했다. 이 때문에 독일의 이라크 파병 거부 및 반대에 미국은 배신감을 느꼈다. 독일은 어떠한 조건에서 언제 이라크에 파병할 것으로 보나.

▶논넨마허=독일은 미국 등과는 달리 이슬람권과 큰 이해관계가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파병이 어려운 상황이다. 파견한다 하더라도 전투병은 안 된다. 평화유지군은 가능하지만 현재의 여건상 어렵다. 아프가니스탄이나 보스니아.코소보 등에 이미 독일군을 많이 파병해 여력이 없다. 독일의 국방예산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유=미국이 한국의 추가 파병을 요구해와 우리도 이 문제를 놓고 고민 중이다. 젊은층과 진보주의자들 중에는 이라크가 '제2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논넨마허=이라크는 결코 제2의 베트남이 될 수 없다. 후세인은 호치민이 아니고 지정학적인 여건도 서로 다르다. 파병에 대해서는 각국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 혈맹관계를 가져왔다. 단순히 건설회사들이 이라크 재건사업에서 득을 본다거나, 총선에서의 유불리 등을 따지는 정치적인 이해득실보다는 미국과의 관계가 더 중요한 변수라고 본다.

▶유=한국이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일부 빼서 이라크로 보낸다는 소문도 있었다.

▶논넨마허=국제문제를 너무 냉소적이거나 이상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은 전략적 차원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다. 한국을 위해서만 주둔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유=분단국가인 한국은 독일의 통일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논넨마허=독일 통일 후 보니 동독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빈곤했다. 북한은 이보다 더 가난할 것이다. 게다가 남북한은 50년 이상이나 철저히 분단돼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질화 정도가 더 심할 것이다. 한국의 통일 과정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독일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일은 어느날 갑자기 산사태처럼 올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이에 잘 대비해야 한다.

▶유=한국은 지난 정권 때부터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을 취해왔다. 앞으로도 북한을 계속 도와줘야 하나.

▶논넨마허=급부가 있으면 반드시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 일방적 지원은 난센스다. 한국이 주기만 한다면 북한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햇볕정책은 약간의 실망을 주고 있다. 서독은 돈과 상품을 주고 국경 개방.편지 교환 등 대가를 받아냈다. 동독이 인도주의적인 방향으로 정책을 변화할 때만 지원한 것이다.

▶유=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베이징에서 6자회담이 열렸는데 이를 어떻게 평가하나.

*** 북핵, 이라크식 해결 곤란

▶논넨마허=남북한 간, 또는 북.미 간 양자의 문제를 다자의 틀로 끌어들인 것은 잘한 일이다. 다양한 해법이 나올 수 있다. 북핵 문제를 이라크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안 된다. 이보다는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압력을 넣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독일의 강성노조가 경제 침체의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도 있다.

▶논넨마허=맞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떨어져 실업률이 높아지고, 과다한 사회보장 지출은 재정적자로 이어졌다. 이것을 개혁하지 않으면 독일 경제가 살아나기 힘들다. 무엇보다 '동일 노동.동일 임금' 원칙이 폐지돼야 한다. 일자리를 잃었을 때 오히려 월급이 늘어나는 현재의 모순은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

▶유=한국에서도 강성 노조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 회사는 노조 간부들에게 고급 승용차를 제공하기도 했다.

▶논넨마허=이유는 부패했든지, 몰상식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예컨대 최고경영자의 연봉이 1백50만달러에서 2백50만달러로 올랐는데 내 연봉은 5만달러에서 4만달러로 줄었다면 누구나 불공평하다고 느낀다. 바람직한 노사관계란 서로의 입장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평 속에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정리=한경환 기자<haelmut@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 권터 논넨마허는

귄터 논넨마허(54)는 디터 에카르트.베르톨트 콜러.프랑크 쉬르마허.홀거 슈텔츠너와 함께 세계적 권위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의 5명의 발행인 중 한 명이다.

독일 남서부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정치학과 역사.철학 및 법률을 전공했고 1975년 하이델베르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해 10월부터 82년 10월까지 7년 동안 부퍼탈대에서 정치학 교수로 강의했으며 82년에는 '정치철학의 진화'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넨마허는 82년 10월 FAZ에 들어가 86년부터 이 신문 국제담당 에디터로 일해왔으며 94년 발행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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