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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인조의 피신처 공산성, 광복루는 백범이 작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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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호 17면

[이훈범의 문명기행] 1500년 역사 흐르는 천연요새

곧 쓰러질 것 같은 고목조차 공산성의 모든 역사를 증명하지 못한다. 뒤로 보이는 전망대는 1970년대 건립 당시 유신대라 불리다가 90년대 들어 공산정이 됐다. [박종근 기자]

곧 쓰러질 것 같은 고목조차 공산성의 모든 역사를 증명하지 못한다. 뒤로 보이는 전망대는 1970년대 건립 당시 유신대라 불리다가 90년대 들어 공산정이 됐다. [박종근 기자]

역사란 저절로 난 길과 같다. 현대인이 걷고 있는 그 길은 옛사람이, 그 옛사람의 옛사람이, 그리고 더 오랜 옛사람이 지나며 넓혀온 길이다. 맨발로도 걸었고, 미투리와 비단신을 신고도 지났으며, 때론 군화발로 짓밟히기도 했다. 너른 길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다닌 것이다. 그 변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차지하고 있는 현대인들조차 그 길의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한다. 한때 지나치는 손님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역사가 제 것인 양 주물러보려는 주인 행세는 꼴같잖다. 고대 로마의 수사학자 퀸틸리우스의 말처럼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얘기하기 위해서지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백제 문주왕 때 축성, 의자왕 항복지 #인조, 이괄의 난 피해 7일간 머물러 #데라우치 총독, 중군영 폐지하고 #해상루를 웅심각으로 바꿔 불러 #백범이 광복 기리자고 제안해 개명

공산성 성곽 길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이 한산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면서 수도 방어를 위해 만든 성이다. 하지만 지금의 공산성은 이후 사람들의 흔적이 더 많이 남아있다. 고려와 조선, 광복 직후의 모습까지 하고 있다. 공산성 서문이었던 금서루를 받치고 있는 오늘날 출입구 모습은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인조에게 바친 임씨 떡이 절미라 ‘인절미’  

9층석탑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못인 연지와 만하루 뒤로 금강이 흐른다.

9층석탑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못인 연지와 만하루 뒤로 금강이 흐른다.

쓰임새가 계속 있음으로, 당연한 진화다. 역사는 더 이상 쓰이지 않을 때 유적이 된다. 오늘날 공산성은 커플들의 데이트 코스로 주로 이용되지만, 언제 본래의 쓰임새를 되찾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또 변화를 한다면 굳이 지금의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터다. 자연스럽게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문화의 축적이요, 곧 문명인 까닭이다.

공산성 안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대체로 조선시대의 것들이다. 원래 토성이었던 웅진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도 조선 때다. 그런데 남아있는 게 크게 자랑스러울 게 못 된다. 금서루를 지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백제왕궁 터가 나오는데, 거기에 남아있는 쌍수정(雙樹亭)이 그렇다.

이괄의 난 때 인조가 달아나 머문 장소에 세운 정자다. 인조는 당시 공산성에서 일곱 날을 머물렀는데, 두 그루 큰 나무 아래서 한양 쪽을 바라보며 난이 진압되기만을 오매불망 바랐다. 환도하면서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주었던 고마운 나무에 정3품 통훈대부 직을 하사했다. 이후 불쾌했는지(최소한 자랑스럽지는 않았을 터다) 나무는 죽고 영조 10년에 관찰사 이수항이 그 자리에 쌍수정을 지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공산성 출입구가 된 금서루.

오늘날 공산성 출입구가 된 금서루.

선량하기 짝이 없는 이 나라 백성들은 못난 임금을 위해서도 정성을 다한다. 어느 날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자기 마을에 피난 중인 인조에게 떡을 바쳤다. 먹어보니 쫄깃쫄깃한 것이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왕이 떡의 이름을 묻는데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이에 인조가 임씨가 만든 떡이 맛이 절미(絶味)라 해서 ‘임절미’라 이름 지었는데 그것이 곧 인절미의 어원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선조의 도루묵과 같은 얘기다. 어쨌거나 공주 시민들은 백제문화제 기간에 함께 ‘공주 떡’ 인절미를 만드는 행사를 한다. 그때 인절미의 길이가 475m란다.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해가 475년이어서다.

왕의 피신처가 될 만큼 공산성은 전략적으로 뛰어난 군사거점이었다. 공주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표고 110m의 공산과 인접한 금강이 천연요새 역할을 한다. 의자왕이 항복한 곳도 공산성이었고, 통일신라 말기 난을 일으킨 웅진도독 김헌창이 최후까지 항거한 곳도 공산성이었다. 1010년 거란족 침입 당시 고려 현종이 피신했던 곳도 공산성이었고, 한국전쟁 때 미군이 주축이 된 금강 방어전의 주 전선이 공산성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본연의 쓰임새가 완전히 사라진다. 근대화로 전쟁 개념이 달라진 탓도 있지만 식민지에 훌륭한 요새를 남겨두는 건 ‘불령한’ 움직임을 생산할 위험만 컸다. 일제가 성안의 중군영을 폐지하고 일부 지역을 개인에게 불하하면서 중군영지였던 성안마을을 중심으로 거주민이 크게 늘어났다. 한때 300여 호에 달하는 주민들이 공산성 내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공주시내에 거주하던 도시빈민들이었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변변한 일자리도 갖지 못했던 이들은 대부분 일용 노동자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당시 공주 읍내를 주름잡던 폭력배와 소매치기 등 범죄자들은 대부분 성안마을 출신이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가 전한다. 이들은 그래서 읍내 사람들에게 ‘성안놈들’로 멸시받았다. 성안마을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 50여 호의 주민들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공산성엔 고려 때 창건된 절 영은사도

백범 김구가 이름 지은 광복루.

백범 김구가 이름 지은 광복루.

공산성에는 해방 직후의 스토리도 있다.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광복루 얘기다. 이 건물은 원래 공산성 내 중군영의 문루였다. 당초 위치도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고 이름도 해상루(海桑樓)라 불렸다. 중군영을 폐지한 조선총독 데라우치는 해상루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이름도 웅심각(雄心閣)으로 바꿨다. 1946년 공주를 방문해 누각에 오른 백범 김구가 사연을 듣고 조국 광복을 기려 광복루로 바꾸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해 지방시찰에 나섰던 김구가 공주를 방문한 것이 이맘때인 4월 22일이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뤄 김구 일행은 금강 건너편에서 차에서 내려 걸어서 금강교를 건너왔다고 한다. 사진도 있는데 중절모에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맸다. 바지는 통이 좁고 정강이 맨살이 드러나도록 짧아 요즘 젊은층에 유행하는 스타일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공산성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절 영은사(靈隱寺)도 있다. 19세기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에는 백제시대에 세운 것으로 돼있으나 절 주변에서 발견된 석탑 재료가 고려 초의 유물로 밝혀져 그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세조 때는 묘은사(妙隱寺)로 불렸는데 인조가 영은사로 고쳤다고 한다.

이처럼 공산성 안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들어차 있다. 그러나 백제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탓인지 백제의 숨결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감이 없잖다.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처음 발견한 게 백제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백제의 웅진 시대(475~638) 63년 역사만을 위해 공산성을 남겨두기에는 이후 1500년이 넘는 역사와 문화가 너무도 길고 조밀하다. 공산성을 스쳐간 백제 이후 세대의 발걸음을 살핀다고 해서 백제의 역사와 문명이 허술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빈틈 없이 꼭꼭 채운 촘촘한 ‘우리’의 이야기가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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