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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잔심부름 하기 아까워” 29세 우궈쩐에게 우한 맡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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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71>

1941년 1월, 전시 수도 충칭을 방문한 국부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왼쪽 셋째)을 영접 나온 우궈쩐(중절모 쓴 사람). [사진 김명호]

1941년 1월, 전시 수도 충칭을 방문한 국부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왼쪽 셋째)을 영접 나온 우궈쩐(중절모 쓴 사람). [사진 김명호]

일단 써 보고 신통치 않으면 내치는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온갖 조사 철저히 한 후에 기용하는 사람이 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전자에 속했다.

3개월 지켜본 뒤 시장에 임명하며 #“부인도 시장 부인으로 손색없다” #우궈쩐 재난 날 때마다 현장 지켜 #시간 갈수록 지역민 칭송 높아져 #우궈쩐의 친구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에 우를 끌어들이려 애써

1932년 8월,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가 후베이(湖北)성 재정청장 우궈쩐(吳國楨·오국정)을 호출했다. “몇 살이냐?” “스물아홉입니다.” “시종실에 근무해라.” 3개월이 지났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궈쩐은 인재다. 영어 문서 뒤적거리며 잔심부름 하기에는 아깝다. 우한(武漢) 시장으로 내보낼 생각이다.” 우궈쩐의 부인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20대 초반이지만 시장 부인으로 손색이 없다.”

7년 전, 길가던 장제스가 소변 보러 쑹즈원(宋子文·송자문) 집에 갔다가 쑹메이링 보고 반한 것처럼, 우궈쩐과 황쭤췬(黃卓群·황탁군)의 만남도 희극적이었다. 재정청장 시절 우궈쩐은 거리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하루는 사진관에 걸려 있는 소녀 사진 보고 누군지 궁금했다. 옆에 걸린 평판이 그렇고 그런 여배우의 사진 보자 머리가 반짝했다. 주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명망가의 딸을 여배우와 함께 걸어 놓고 호객행위 하다니, 누구 집 천금인지나 알고 그랬느냐?” 사진관 주인은 청년의 가슴에 붙어 있는 공무원 배지를 보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철도청장 큰딸이다. 상하이 여학교 졸업반이다. 방학 때 왔다가 찍었다.” 철도청장은 우궈쩐의 형 친구였다. 형 소개로 황쭤췬을 만났다. 철도청장이 결혼을 서둘렀다.

황쭤췬은 재주덩어리였다. 미국인 여교수의 구술을 소개한다. “황쭤췬은 예쁘고 현명했다. 문장이 빼어나고 그림에도 능했다. 재봉 솜씨도 뛰어났다. 우궈쩐은 황쭤췬이 만든 양복을 입고 다녔다.” 묘한 말도 했다. “장제스도 황쭤췬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볼 때마다 쑹메이링 몰래 곁눈질을 했다. 쑹메이링은 예절 바르고 영어에 막힘 없는 우궈쩐에게 호감을 느꼈다. 민망한 소문이 나돈 적도 있었다. 나이는 쑹메이링이 다섯 살 위였다. 쑹메이링과 황쭤친은 용모나 분위기가 비슷했다.”

장제스의 머릿속에 우한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중국인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 있다. 장제스가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펑위샹(馮玉祥·풍옥상)과 온천에 간 적이 있었다. 평소 으르렁거리는 사이였지만, 탕 안에 벌거벗고 있다 보니 긴장이 풀렸다. 장제스가 무의식 중에 말했다. “만약 베이징·광둥·상하이·우한 네 곳만 손아귀에 넣는 사람이 나온다면, 전 중국은 그놈의 천하나 다름없다.” 젊고 경력도 보잘것없는 우궈쩐을 우한 시장에 임명한 것은 능력 하나 때문이었다.

우궈쩐의 부인 황쭤췬은 서화에 능했다. 항일의연금 모금 위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우궈쩐의 부인 황쭤췬은 서화에 능했다. 항일의연금 모금 위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시장 우궈쩐은 일반 국민당 관료들과 달랐다. 홍수가 나건, 산사태가 나건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칭송이 자자했다. 1935년 여름, 폭우가 쏟아졌다. 제방이 아슬아슬했다. 우궈쩐은 제방 인근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공무원을 인솔하고 제방 위에 올랐다. 2000여 명과 함께 삽 들고 제방 위에 흙을 날랐다. 장쉐량(張學良·장학량)도 병력을 동원해 거들었다. 감격한 부호들이 돈을 걷었다.

그해 12월 9일 베이징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가 벌어졌다. 우한도 들썩거렸다. 학생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왔다. 우궈쩐도 시위 행렬에 합세했다. 주먹 쥐고 “친일파 타도”를 외쳤다. 시위대가 해산한 후에 시장 집무실로 향했다. 항일을 외쳐 대던 국민당 고급관원 중에 유일한 시위 참가자였다.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했다. 국민정부는 충칭(重慶)으로 천도했다. 옌안(延安)에 항일근거지지를 차린 공산당은 충칭에 연락사무소를 차렸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중책을 맡겼다.

충칭은 산과 강에 둘러싸인, 사람 살 곳이 못됐다. 꼬불꼬불하고 울퉁불퉁한 골목에 집들이 계단처럼 늘어선 이상한 도시였다. 일본군의 공습으로 가옥과 인명 손실이 하루가 달랐다. 제대로 된 공원도 없었다. 장제스는 우궈쩐이 떠올랐다. 충칭 시장을 맡겼다.

충칭에서 우궈쩐은 소년 시절 밀우(密友), 저우언라이와 상봉했다. 프랑스로 떠나는 저우와 텐진(天津)부두에서 헤어진 지 16년 만이었다. 주장과 신앙이 달라진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논쟁을 일삼았다. 하루는 모교 난카이(南開)중학 설립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간 중국이 언제 제대로 될지 고민 많이 했다. 이제야 답을 찾았다. 간단하다. 너희 둘이 다투지 않아도 될, 바로 그날이다.” 우궈쩐과 저우언라이가 동시에 말을 받았다. “사사롭게 다툴 일은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우언라이는 통일전선 전문가다웠다. 우궈쩐을 공산당에 끌어들이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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