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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영의 글로벌 인사이트] 중국, 보잉 737 맥스 보이콧 뒤에는 C919 야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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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중국이 미국 정부와 항공기 제조업체 보잉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글로벌 항공산업 주도권과 미국과의 무역협상을 둘러싼 행보로 보인다.

C919, 737 맥스와 동급 중국 여객기 #보잉·에어버스와 경쟁, 815대 수주 #중국, 2022년 세계 최대 항공 시장 #미·중 무역협상 지렛대 활용 전략도

중국 민항총국(CAAC)은 에티오피아에서 추락한 보잉 737 맥스 8기종에 대한 감항능력(airworthiness) 인정을 유예한다고 27일 밝혔다.

보잉이 소프트웨어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중국이 다시 감항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중국 내 운항이 어렵게 된다. 에티오피아 추락 사고 다음 날인 11일 중국 항공사가 보유한 사고 기종 96대의 운항을 금지한 데 이은 두 번째 조치다.

중국은 가장 먼저 ‘보잉 보이콧’ 테이프를 끊었다. 아시아와 유럽, 남미 주요 국가가 일제히 뒤따르자 버티던 미국도 결국 사고 기종 운항을 금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아메리카 퍼스트’가 흔들린 순간이다.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일방주의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제동을 건 셈이다. 중국의 결정으로 전 세계에서 운항 중이던 B737 맥스 항공기 387대의 발이 묶이게 됐다.

미 연방항공안전청(FAA)에 도전하는 중국

‘메이드 인 차이나’ 항공기

‘메이드 인 차이나’ 항공기

중국의 선제적 결정에 항공 전문가들은 깜짝 놀랐다. 통상 항공사고는 조사 완결 후 원인이 밝혀진 뒤 운항금지 같은 조치를 한다. 그런 움직임을 주도하는 곳은 전통적으로 미국 연방항공안전청(FAA)이었다.

그간 국제사회에서 중국 항공당국의 역할은 미미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표현을 빌리면 “국제 레이더망에서 ‘삑’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중국이었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FAA가 내놓는 지침을 관례대로 따르는 쪽이었다. WSJ은 “이번 조치로 중국의 힘을 세계에 보여줬다”고 했다.

항공 전문지 ‘에어라인 레이팅’의 제프리 토머스 편집장은 “아직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국제관례를 깨고 B737 맥스 항공기 운항 금지 명령을 내린 것은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중국의 자신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자신감의 배경은 쑥쑥 크는 항공 시장이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중국은 이르면 2022년 승객 수 기준 세계 최대 항공 시장이란 타이틀을 미국으로부터 넘겨받을 전망이다. 2037년께 중국은 연간 16억 명, 미국은 13억 명의 항공 승객을 실어나르게 된다.

중국은 보잉과 유럽 에어버스에 황금 시장이 됐다. 최근 5년간 보잉은 중국에 항공기 1000대를 인도했다. 2037년까지 7690대, 1조1900억 달러(약 1352조원) 규모를 판매할 계획이다. 이 가운데 5730대가 B737 맥스를 포함한 소형기종이다.

항공 산업 강자 꿈꾸는 중국

22일 미국 시애틀 보잉 공장에서 시험 운행 중인 오만항공의 B737 맥스 . [AP=연합뉴스]

22일 미국 시애틀 보잉 공장에서 시험 운행 중인 오만항공의 B737 맥스 . [AP=연합뉴스]

이렇게 커진 항공 시장을 중국이 마냥 외국 기업에 내줄리 만무하다. 여객기를 독자 개발해 보잉과 에어버스의 양강 독점 체제를 흔드는 게 중국 정부의 오랜 꿈이자 목표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2015년 첨단 제조업 육성을 위한 ‘중국제조 2025’ 10대 분야를 발표하면서 항공 산업을 포함했다. 보잉과 에어버스는 글로벌 소형 여객기 시장의 97.4%(2017년)를 차지한다.

중국 독자 개발 항공기 전략의 선봉에는 국영 항공기 제조업체 ‘중국상용항공기(Comac·코맥)’가 있다. 코맥의 대표 선수는 소형 항공기 C919이다. 승객 158~168명을 태울 수 있는 이 기종은 B737 맥스와 에어버스 A320 네오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됐다.

2017년 시험 비행에 성공한 뒤 에어차이나, 중국동방항공, 중국남방항공 등 28개 항공사가 815대를 주문한 상태다. 중국동방항공이 2021년께 첫 비행기를 인도받을 예정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이지만 엔진 등 핵심 부품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 전문기업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엔진은 프랑스와 미국의 합작회사인 CFM인터내셔널, 착륙 장치는 독일 리베르 에어로스페이스, 비행 기록 장치는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이 공급한다.

보잉의 위기를 코맥의 기회로

항공시장

항공시장

경쟁 기종인 B737 맥스의 사고는 C919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미 싱크탱크인 랜드코퍼레이션의 채드 오랜트 시니어 엔지니어는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인터뷰에서 “중국의 선제적 조치는 코맥이 (글로벌 항공 산업에) 첫발을 들이는 기회가 됐다”며 “소형 항공기 구매를 검토 중인 글로벌 항공사의 문을 열심히 두드리지 않겠냐”고 말했다.

실제로 B737 맥스 운항 중단 이후 코맥이 자체 생산한 항공기의 해외 계약이 추진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아프리카 가나에 본부를 둔 아프리카월드항공은 코맥의 90인승 항공기 ARJ21을 2대 구매할 계획이다.

2016년 첫 상업 비행을 한, 코맥의 첫 작품이다. 아프리카월드항공 지분을 중국 HNA그룹이 갖고 있긴 하지만, 중국산 항공기를 해외에 수출한 사례가 드물다 보니 중국은 쾌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산 항공기를 선진국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주요국 항공당국으로부터 감항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미국과 유럽 항공당국으로부터 주력 기종인 C919에 대해 감항능력 승인을 추진 중인데, 이르면 2021년께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에 먼저 수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항공기 수출은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정책과도 맞물려 있다. 공항과 인프라 건설을 지원하면서 항공기까지 파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항공 컨설턴트 수코르 유소프는 “값이 싼 메이드 인 차이나 항공기를 끼워 파는 게 일대일로 전략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중국이 아프리카 국가들에 중국산 항공기 주문을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테쇼메 토가 차나카 주중 에티오피아 대사는 지난 17일 상하이 에어쇼에서 코맥 항공기에 탑승한 사진을 올리면서 “이 비행기를 창공에서 볼 날이 머지않았다”고 언급했다.

전문가들은 코맥이 보잉·에어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까지는 앞으로 수십 년이 더 걸릴 것으로 전망한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브룩 서더랜드는 “중국산 항공기는 서구 항공기 제조업체들과 같은 수준의 안전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중국이 FAA보다 선제적으로 나섬으로써 안전 파수꾼 이미지를 챙기려 했다는 분석이다.

미·중 무역협상 지렛대로 활용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보잉 운항 금지를 전략적으로 이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미 외교잡지 포린 폴리시는 “중국의 결정은 항공기 안전 때문만은 아닌 거로 보인다”면서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국이 추가 구매하기로 약속한 목록에 B737 맥스가 들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지 퍼거슨 항공 애널리스트도 중국의 B737 맥스 금지를 “대미 무역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중국의 가식적인 행동”으로 해석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무역 갈등이 항공기 안전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매우 우울하지만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당장 중국은 추가로 사들이기로 한 미국산 상품 목록에서 보잉 항공기를 제외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미 언론은 중국이 안전 문제를 이유로 이 기종을 제외하거나 다른 기종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국내 정치적 관점이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보잉 보이콧 결정을 내린 시점에 베이징에서는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미국과의 무역협상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부각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리젠 중국 민항총국 부총국장은 지난 11일 보잉 보이콧 기자회견에서 5개월 새 두 차례나 치명적인 인명사고를 냈는데도 미 FAA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취지로 미국의 리더십을 비판했다.

박현영 글로벌경제팀장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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