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책·영화의 숲에서 하는 '마음 삼림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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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정여울 지음, 강, 345쪽, 1만 2000원

집안에 잔뜩 쌓인 소년소녀 창작동화집이 유일한 친구였던 '왕따' 소녀, 고3 때조차 잠잘 시간을 아껴 텔레비전을 부둥켜 안고 살았던 '드라마홀릭'…. 책.드라마.영화의 숲에 빠져 살아온 저자는 서울대 출신 국문학 박사 타이틀을 달면서 '먹물'을 잔뜩 머금은 '아가씨'로 성장한다. 이 책에는 국문학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그가 쓴 서평과 드라마평, 영화비평 등이 담겨 있다. 저자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이야기하기 위해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한 장면을 끄집어내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견주어가며 분석하다가 종래엔 김훈의 '칼의 노래'에 대한 자신의 집착과 독점욕을 털어놓는다. 서평을 쓰더라도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썰'을 풀어나가는 서론이 더 긴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저 말을 풀어놓기 위해 적은 서론이라기엔 그 자체를 따로 떼어 보아도 무방할 만큼 꽉 찬 글이다. 저자는 드라마면 드라마, 책이면 책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평생을 두고 머릿속에 차곡차곡 채워놓은 먹물(글자)과 물감(영상)을 끄집어내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그 먹물과 물감은 혼돈의 회색으로 뒤섞이는 게 아니라 절묘한 마블링을 그려낸다. 그 사이 사이에 저자의 삶과 기억도 섞여 있다. 대중 앞에 선뜻 내놓기 힘들 것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 혹은 상처마저도 약방의 감초처럼 그의 비평에 쓰인다.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생채기들을 저자는 대중문화란 숲 속 삼림욕으로 치유하는 게 아닐까.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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