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미 속의 권력 투쟁 중국군 동향|「이·양 집단」유리한 고지 선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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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경 시위군 중 학살의 주역인 27군이 천안문 광장에서 철수한 7일을 고비로 북경시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8일에는 강경 진압을 주도한 「리펑」 (이붕) 수상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나 대세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였다. 27군의 천안문 철수는 「이·양상곤 집단」이 대세를 장악한 가운데 피의 학살 선봉대로 국민들의 원성이 높은데다 피로에 지친 것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계엄군과 반대 군간에 고조되고 있는 긴장 상태를 완화키 위해 쌍방은 북경시 최중심부인 천안문 광장 주둔군을 27군에서 중립군으로 교체키로 합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8일 오후 북경 중앙 TV가 이붕 수상과 「왕전」 (왕진) 국가 부주석이 8일 오전 인민대회당 계엄군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방영한데 이어 중국 7대 군구 중 성도·난주 군구를 제외한 북경·심양·제남·광주·남경 군구가 당 중앙·국무원·중앙 군사 위원회의 반혁명 폭란 진압을 전폭 지지하며 중앙군사위의 명령을 철저히 준수할 뜻을 밝혔다고 북경 중앙 라디오가 9일 보도 한 것은 그동안 심한 갈등을 빚었던 군부 중 다수가 「이·양 집단」으로 기울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덩샤오핑」 (등소평), 국방부장 「친지웨이」(주기위), 전인대 상무위원장 「완리」 (만리) 등이 활동했던 제2야전군계의 난주·성도 군구가 「이·양 집단」 지지를 표시하지 않고 있어 아직 군내부가 분열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록 북경 군구가 「이·양 집단」 지지를 표명했으나 주둔지인 하북성 보정에서 북경 서부 지역으로 진주한 북경 군구 소속의 38군이 이에 동의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38군은 같은 북경 군구 소속의 27군 (하북성 석가장 주둔)과 잇단 총격전을 벌였던 것이 확인됐으며 현재 북경시 서부 복흥문로의 군사 박물관 부근에 진주해 있다.
27군이 천안문 철수로를 동쪽으로 잡고 직송 보급 차량이 동장안가를 따라 동쪽으로 오가고 있는 것은 38군의 저항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하는 분석도 가능하다.
38군이 학생 데모에 동정적이고 피의 진압에 반대한 것은 진기위 국방부장의 영향력이 컸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38군의 역사에 그럴만한 배경이 있다.
6·25전쟁에도 참전한바 있는 38군은 「왕패군」이라고 부를 정도의 정예 부대로 문화 혁명 기간 중 신문사·방송국·연구 기관 등에 파견돼 보도 통제를 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현재 38군의 고급 장교들이 바로 문혁 당시 이들 보도·연구 기관에 파견됐던 「군선대」로 지식 계층을 이해·동정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87년1월 「후야오방」 (호요방) 당시 총서기의 실각을 초래한 학생 시위대의 입영·교육·훈련을 담당한 것도 바로 38군으로 이 기회를 통해 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들과도 가까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북경에서 가까운 보정시에 주둔하는 38군의 장병들 중 북경 출신이 많고 그 가족들이 북경에 살고 있다는 것도 피의 진압에 소극적인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27군은 중앙 군사위 부주석 겸 국가 주석인 양상곤을 필두로 3대 총부의 총 참모장 「츠하오텐」 (지호전)이 사위, 총 정치 부주임 「양바이빙」 (양백빙)이 동생이며 이들이 9명뿐인 국가 군사위 멤버라는 점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다 최정예 부대중의 하나인 27군이 역시 「양가군」 (양상곤의 아들·일설은 조카가 지휘)이라는 행동 부대까지 확보하고 있다.
권력 투쟁은 누가 다수 군부의 지지를 얻느냐에 승부가 달려 있다는 점에서 7개 군구 중 5개 군구의 지지를 받은 「이·양 집단」은 확실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경=박병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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