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기 KT배 왕위전 23일부터 도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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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창호 9단은 소년 시절 나의 우상이고 신화였다."

결전을 앞둔 이영구 5단의 첫마디다. 거무스레한 피부에 들소 같은 눈을 지닌 야생의 이영구는 이창호와의 5번기 승부를 잔뜩 기대하며 흥분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빠른 수읽기와 거친 바둑, 강력한 파괴력으로 뭇 강자들을 무너뜨리고 왕위전 도전권을 쟁취한 이영구는 어린 시절의 우상이었던 이창호와 마주 앉아 적수로서 긴 승부를 펼치게 되었다는 사실이 못내 믿어지지 않는 눈치다.

천하제일 이창호 9단 대 신예강호 이영구 5단의 40기 KT배 왕위전 도전기가 23일 한국기원에서 시작된다. 왕위전 사상 처음으로 지난해 10연패를 이뤄낸 이창호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이영구를 맞이한다. "이영구는 좋은 재능을 지녔다. 재미있는 승부를 기대한다"고 이창호는 말한다. 최근의 이창호는 실수도 많아졌고 신진들에게도 곧잘 진다. 전성기 때 보여줬던 초인적인 집중력을 지닌 절대강자의 이미지보다는 스스로의 실수에 놀라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더 많이 보여준다.

그렇더라도 이창호는 아직 신예들이 넘보기엔 너무 높은 산인지 모른다. 프로기사들의 일반적인 예측은 6 대 4로 이창호 우세. 이영구의 스승이었던 권갑룡 7단은 "첫판이 중요하다. 첫판을 이영구가 이긴다면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경험 미숙과 노련미 부족으로 이영구가 이창호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번 대결에서 이영구가 이창호 바둑을 제대로 흡수한다면 그는 앞으로 중국바둑과 대항하는 한국바둑의 중요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다. 승패를 떠나 이영구에겐 일생일대의 기회다."

이영구 5단은 수를 빨리 보고 거친 바둑을 구사하지만 이세돌과는 다르다. 이세돌이 실리적이며 좀 더 영리한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이영구는 공격적이며 덤벙대는 구석마저 있다. 그러나 순발력과 힘, 수읽기의 빠르기에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풍부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어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영구는 그렇다면 이번 대결의 승패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놀랍게도 그는 이창호 9단을 좋은 스승으로 생각하고 한 수 배우겠다는 의례적인 얘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창호를 이길 자신이 있느냐고 묻자 눈을 가늘게 뜨고 장고하더니 "있다"고 잘라 말한다. "이창호 사범님이 터무니없는 착각을 많이 하시잖아요. 전과는 다른 것 같고…아무튼 전력을 다해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이창호 9단은 현재 랭킹 1위다. 이영구 5단은 11위. 중요한 점은 이영구의 랭킹이 끊임없이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영구는 1987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고 2001년 프로가 됐다. 지난해 마스터즈 제왕전에서 우승했으며 신예대회에서 세 번 준우승한 경력이 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두 번 만나 두 번 모두 이창호가 이겼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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