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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23. 나의 어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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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꽹과리를 치며 신명나게 춤을 추시는 어머니.

누구나 어머니를 떠올리다 보면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내 어머니는 환자를 보느라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잠도 편하게 못 자는 딸을 항상 안타까워하셨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아주 각별하고 소중한 분이다. 나의 전부였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셨다. 그저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인데, 그것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마음의 울림'으로 남아있다.

내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하셨다. 유교 중심의 시절, 얼마나 삶이 신산스러웠을까. 호된 시집살이에 위축될 법도 했으련만 기억 속의 어머닌 늘 당당하셨고 인정 많으시고, 시대를 앞서 가셨다.

어렵던 시절 거지가 찾아오면 어머니는 늘 고봉밥을 손수 차려 주셨다. 그것도 우리 두 자매에게 직접 날라주라고 하셨다. 추운 날씨에도 어머니는 어김없이 고봉밥 심부름을 시키셨다. 쇠경 또한 깎는 법이 없으실 만큼 인정 많고 넉넉하셨던 분이셨다.

문맹률이 높았던 시절이었건만, 어머니는 예배당 야학에 나가 언문(한글)을 깨치셨다. 오빠들이 다니는 서당까지 쫓아가 어깨너머로 한자도 익히셨다고 한다.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떼신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곧잘 이야기책을 읽어주곤 하셨다. 집에는 그가 방물장수에게서 사들인 고전 소설이 가득했다. 어머니가 '춘향전' '흥부전' '유충렬전'과 같은 이야기책을 낭랑한 목소리로, 구성지게 읽으면 동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저런 저런… 이 일을 어째야 쓸꺼나!"라며 맞장구를 친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학자님'으로 통했다.

일본어도 배우셨다. 당시 일제는 한글을 못 쓰게 했으며, 하루에 한 문장씩 인쇄된 일본어를 나눠주며 의무적으로 익히도록 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기차표를 사야했다. 당연 일본어로 말해야 했기에, 바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리리 이치마이 구다사이(이리 한 장 주세요)"

"림빠 이치마이 구다사이(임피 한 장 주세요)"

어머니는 신식 여성으로 시대를 앞서 사신 분이셨다. 당시 시골에선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핸드백이며, 상해양말(지금의 스타킹)을 차려입고 마실을 다니실 만큼 멋쟁이였다. 어느 날 마을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는데, 어머니가 군산으로 나가 쪽찐 머리를 풀고 머리카락을 부풀려 올리는 이른바 히사시카미(낭지머리) 머리를 하고 돌아오신 게 아닌가. 당시 농촌 사회에서는 파격이었다.

여행도 많이 다니셨다. 당시 옥구군 주변의 몇몇 가정들이 모이는 친목계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들과 함께 서울 창경원 등으로 나들이를 즐기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거기서 한발 더 나가셨다. 그 시절 혼자 여행이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도 중국의 봉천(지금의 심양)까지 다녀오셨다.

어머니의 그런 성격 때문인지 당시 낯설었던 성당에도 다니셨고, 훗날 인간문화재가 된 소리꾼들로부터 소리도 배우시고, 장구와 꽹과리를 익히기도 하셨다.

어머니의 한마디는 자녀를 평생 즐거움으로 살게 하는 기둥이 된다고 했고, 자식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고 했던가. 어머니의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사고, 베풂과 평등사상이 자연스레 내 몸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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