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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혁백의 퍼스펙티브

트럼프, 북한도 미국 영향권 편입 노린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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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포스트 세계화와 한반도 냉전 해체

“이 장벽을 허물어라!”(Tear down this wall!)

트럼프의 신냉전 전략은 #동북아에서 한·일 내세워 #중국 제어 역할 맡기려 해 #미국은 비핵화 협상 통해 #북한도 미 패권에 편입해 #경쟁국 중국 견제 노려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목표 이루기 위해 #산파 역할에 충실해야

레이건 대통령은 1987년 베를린장벽 앞에서 “이 장벽을 허물어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함으로써 세계화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였다. 레이건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서 승리하여 냉전체제를 해체하였고, 동구와 서구를 갈라놓은 국경을 무너뜨렸다. ‘국경이 없는 세계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람·자본·물자·정보·기술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86년 수백만 명의 불법 이주자를 사면한 이래 민주당 정권도 이를 계승하여 미국의 노동시장이 확대되었다. 초당적 지지를 받은 ‘국경 개방’(Open Borders)으로 조직노동자는 타격을 입었으나 자본은 추가 이윤을 획득하였고 노동 공급의 확대로 경제가 고속 성장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노조의 형해화, 탈규제, 생산의 외주화와 대량 실업 사태, 금융 자본의 지배력 강화로 20% 대 80%의 불평등 사회가 1% 대 99%의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를 초래하였다.

포스트 세계화 시대의 도래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세계화에 대한 좌파의 저항은 2008년 세계화의 심장부인 뉴욕 월가에서 발발한 글로벌 금융 위기에 고무되어 일어나기 시작했고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을 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그러나 이 운동은 글로벌 금융 자본을 패배시키지 못했고 좌파의 반세계화 운동은 실패하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런데 2016년 영국과 미국에서 좌파들이 실패한 반세계화 운동을 국수적이고 보수적인 토착주의(nativism) 백인들이 성공시켰다. 2016년 6월 영국의 중하층 백인들은 국경이 없는 초국가 연합인 유럽연합(EU)을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통과시켰다. 그해 11월에는 ‘국경 개방’으로 일자리를 잃었다고 믿는 중서부 프로스트 벨트(Frostbelt)의 백인 노동자들이 포퓰리스트인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브렉시트와 트럼피즘으로 세계는 포스트 세계화 시대로 들어갔다.

“장벽을 건설하라!”(Build the wall!)

트럼프는 레이건 신자유주의자들과 민주당 주류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국경 개방’을 비판하고 멕시코 국경에 높은 장벽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멕시코 국경 장벽을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2018년 말 미 의회에 3141㎞의 미국-멕시코 국경에 높이 9m의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2019년 예산에 반영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결사적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현재 최장 기간의 연방정부 셧다운이 계속되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 진시황이 이민족인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은 이래 최장의 국경 장벽을 쌓으려 하고 있다. 트럼프의 반 이민정책, 국경 장벽 정책은 세계화로 인한 자본과 고용주의 권력 확대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해소할 희생양을 국경을 넘어들어오는 이주자와 이민자에서 찾으려는 포퓰리스트 정책이다. 트럼프의 멕시코 장벽 건설에는 ‘근육질적 민족주의’, 토착주의, 보호주의, 미국 우선주의, 포퓰리즘이라는 트럼프주의 (Trumpism)의 핵심 요소가 모두 응축되어 있다.

한반도에서는 남북 장벽 철거하려 해

트럼프는 왜 멕시코 국경에는 3141㎞의 미국판 만리장성을 건설하려 하면서 한반도에선 250㎞의 휴전선 장벽을 철거하려 하는가? 멕시코 장벽 건설이 백인 중하층 노동자들을 겨냥한 국내 정치용이라면, 한반도에서 장벽을 철거하려는 이유는 남북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가 패권 경쟁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으로부터 미국의 대외 안보 이익을 지켜줄 방파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250㎞의 국경을 사실상 남북 간에 개방함으로써 중국이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1400㎞의 신냉전 방파제에 직면하게 하겠다는 전략적 원모(遠謀)가 숨어있다.

이제까지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해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역할을 해왔다. 트럼프는 북한을 개방하여 미국의 패권 지도에 편입시킴으로써 북한을 중국의 패권 도전으로부터 미국의 안보 이익을 지켜주는 미국의 순망치한으로 역할 변경을 하도록 기대하면서 남북한 국경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포스트 세계화를 이끄는 트럼프가 국경이 개방된 세계화 시대를 연 레이건의 베를린 장벽 허물기와 비슷한 한반도 장벽 허물기를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트럼프의 한반도 장벽 허물기는 남북 간 소(小)장벽을 허물어 한·중 간 대(大)장벽을 건설하겠다는 대외 안보 전략이다. 그러므로 트럼프의 소장벽 허물기는 대장벽을 건설하기 위한 ‘이보 전진 일보 후퇴’ 전략이다. 레이건은 마침내 냉전 체제가 해체되었다고 자축하면서 “이 장벽을 허물어라”는 승리주의적(triumphalist) 선언을 했지만, 트럼프는 중국을 저지하는 신냉전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

트럼프의 신냉전 전략 : 역외 균형

트럼프는 현실주의자이다. 트럼프의 외교 전략은 이념보다는 이익을 중시하고 세계화 시대의 개입주의적 국제주의를 버리고 미국 중심주의와 고립주의를 선호한다. 트럼프가 포스트 세계화 시대의 신냉전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미어샤이머와 월트의 역외 균형전략(Offshore Balancing)을 선호하는 데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미어샤이머의 역외 균형전략은 공세적 현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역외 균형전략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3대 핵심 전략 지역인 유럽·중동·동아시아 중 유럽과 중동에서는 발을 빼고, 동북아에서는 신흥 패권 경쟁국인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지역 동맹국들에 떠넘겨야 한다(pass the buck). 지역 동맹국들이 중국을 견제하는 데 힘이 부칠 때 미국이 개입하되 주로 해·공군을 이용하고 가능한 빨리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흔히 트럼프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이론가로 키신저와 미어샤이머를 드는데, 트럼프는 미어샤이머의 역외 균형이론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역외 균형이론에 의하면 마지막까지 미군이 주둔해야 할 핵심적 이익이 걸린 지역을 동북아의 일본과 한국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패권 경쟁국인 중국을 제어하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뿐 아니라 북한도 미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북한을 포용하여 남북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국가 대전략이다.

반면 키신저는 방어적 현실주의자이다. 키신저는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 구축의 주역인 메테르니히를 박사 논문 주제로 삼은 데서 보듯이 강대국주의자(plurilateralism)이다. 그래서 그는 중국과 수교를 위해서 대만을 버렸고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는 사전에 알려주지도 않았다. 키신저는 저서 『중국 이야기』(On China·2011)에서 중국과의 공진론을 이야기하면서 중국에 신흥 패권국의 지위를 사실상 부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트럼프와 만나서는 주한미군의 철수와 비핵화의 교환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조언하였다. 강대국주의자이자 친중주의자인 키신저가 한국과 북한을 미·중 간 협력 회복을 위한 장기판의 졸로 쓸 수 있다는 위험한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트럼프는 키신저보다는 미어샤이머를 선택하였다. 그는 주한미군 주둔비 부담 인상 압력을 가하였으나 철수는 언급한 적이 없다.

한반도 냉전 해체 위한 삼두체제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8년을 세 남자의 이상한 브로맨스(bromance)가 이루어진 해였다고 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싱가포르에서 역사적 정상회담을 했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은 세 차례의 정상회담이라는 브로맨스를 가졌다.

2018년 이래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브로맨스는 한반도에서 데탕트(긴장 완화)를 가져왔고 한반도에서 냉전을 해체하는 역사적 시동을 걸었다. 트럼프·문재인·김정은이 주도하는 한반도 삼두정치는 한반도의 정치·경제·안보의 기존 주형(鑄型)을 깨고 새로운 틀을 주조할 것이다. 로마 삼두정치의 수장이 시저라면 한반도 삼두정치의 수장은 트럼프이다. 현실주의자인 트럼프는 북한 핵 위협을 제거하여 동북아의 냉전을 해체하는 역사를 만들고 그 공을 차지하여 2020년 대선에서 승리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다.

2019년에 김정은과 트럼프는 두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하고, 마지막 정상회담에서 평화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후 삼두정치 지도자가 다시 모여 한국전쟁이 공식적으로 종전되었다고 선언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 김정은은 핵무기를 실질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다가오는 미국 대선 과정에서 북한 비핵화는 트럼프에게 긴박하게 요구되는 정치적 선물이기 때문이다.

3자 브로맨스를 유지하기 위해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이 비핵화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게끔 미국과 유엔이 대북 제재를 완화하도록 설득하는 동시에, 미국 매파 관료들에겐 너무 열정적으로 김정은을 껴안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3자 브로맨스의 유지를 통해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라는 소중한 아기의 출산을 돕는 산파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