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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주주권 행사” 다음날 “규제 완화”…헷갈리는 신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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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4일 청와대에서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배석자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4일 청와대에서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배석자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도갓집 강아지도 모르는 게 요즘 청와대 속내예요.”

문 대통령 발언 연초부터 아리송 #재계 “청와대 속내 정말 모르겠다” #시장에 예측 가능한 메시지 줘야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비유했다. 도가(都家)는 조선시대 상설 점포(전·廛)의 계원을 위한 공동 사무실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위워크’ 같은 곳이다. 드나드는 사람이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눈치가 빠른 강아지는 이것저것 던져주는 음식을 받아먹지만 눈치가 없으면 발길에 차이기나 하는 신세다.

그가 재계를 도갓집 강아지에 비유한 건 재계도 정권 눈치를 봐야 하는 생리 때문이다. 눈치가 빠르면 수혜를 누리지만 눈치가 없으면 철창신세까지 지는 세상이다. 대통령이 무심코 흘린 발언 한 마디, 단어 하나도 속내를 파악하려고 귀를 쫑긋 세운다.

재계가 정권 눈치를 보는 건 비단 이번 정권만은 아니다. 도갓집에서 잔뼈가 굵은 눈치 빠른 강아지도 요즘엔 청와대 의중을 도통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재계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반대되는 행보가 이어지고 있어서다. 23일 청와대 공정경제추진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는 대기업·대주주의 중대한 탈법·위법에 대해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수탁자책임원칙)를 적극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대한항공·한진칼을 대상으로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고 있는 미묘한 시점에서 나온 발언이다. 눈치 빠른 재계 입장에선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주요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는 것도 당연했다.

국민연금은 297개 기업 지분을 5% 이상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9.25%)·포스코(11.1%)·네이버(10.3%) 등 7개 대기업에선 최대주주다(지난해 연말 기준). 하지만 24일 청와대는 대통령 발언이 “기업의 중대하고 명백한 위법 활동에 대해 공정한 기준·절차에 따라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행사하라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청와대 해명이 나오자 재계는 또다시 안테나를 세웠다. ‘중대한 위법’이나 ‘공정한 기준’의 의미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중이다.

아리송한 상황은 연초부터 계속됐다. 15일 청와대에서 재계 총수는 ‘노동법·상법·공정거래법 규제 속도를 조절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규제 혁파의 적극적 의지를 확인한 자리”라며 비서실장에게 “기업인 목소리를 반영해 후속조치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22일) 만에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노동법안과 공정경제 법안 처리가 시급하다는 데 당·정·청이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23일 공정경제추진전략회의에서 대통령이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을 강하게 주문하면서 이 말은 사실로 드러났다.

그런데 다음 날인 24일 문재인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 특별시’ 행사에서 “정부는 간섭도, 규제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발언이 이어지자 재계는 더욱 갈피를 잡기 어려워졌다. 재계 관계자는 “도갓집 강아지 신세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음식을 던져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발길로 걷어차겠다는 속셈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금 기업인에게 필요한 건 정책의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이다. 대통령은 지난 15일 청와대 경내를 함께 산책한 총수에게 ‘함께 잘사는 대한민국’이라고 적힌 텀블러를 쥐여줬다. 물병보다는 정제한 발언으로 명확한 메시지를 쥐여줄 때, 대한민국 경제도 온기가 퍼지기 시작할 수 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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