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1.08인구재앙막자] 인생 2막 노후 준비되셨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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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에도 몇십 년을 더 살 텐데… 그땐 뭘 하지? 아프기라도 하면? 생활비는?"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어떻게 되겠지' 하며 애써 잊기도 합니다. 가끔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생각뿐입니다. 직장일이 먼저고, 아이 학원비 걱정에 다른 곳에 눈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퇴직이 코앞에 닥쳐서야 앞날을 걱정하며 허둥댑니다. 사회와 기업의 핵심인 40대, 50대의 모습입니다.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쁘고 힘들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4050세대도 적지 않습니다. 은행 지점장인 윤성원씨가 그런 사람입니다. 퇴직 후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얘기도 들어봤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오듯 편안하고 행복한 노후도 준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 특별취재팀=송상훈 팀장, 정철근.김정수.김영훈.권근영 사회부문 기자, 염태정.김원배 경제부문 기자, 김은하 탐사기획부문 기자, 조용철 사진부문 부장, 변선구 사진부문 기자

*** '귀농 공부 11년차' 은행지점장 윤성원 씨

18일 새벽, 우리은행 삼성센터 지점장 윤성원(53)씨는 여느 주말과 다름없이 옥수동 집을 나선다. 1시간30분 뒤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고향집에 도착한 윤씨. 입고 온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허름한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는다. 노부모와 아침 식사 후 윤씨는 고무신을 신고 집을 나선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털털거리는 트랙터를 모는 윤씨는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아흔이 넘은 부친은 "농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지…" 하며 허허 웃는다.

윤 씨가 주말마다 농사를 짓는 것은 직장인들이 재미삼아 하는 주말농장이 아니다. 논 6000평에 밭 800평을 일구는 주말 농부다. 농토는 부친이 농사짓던 것이다. 윤 씨는 지금 퇴직 후 농사를 짓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논도 좀 더 살 생각이다. 그는 "농촌생활을 희망하는 사람 중에 농사일 배우는 것을 걱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요한 건 진짜로 몸에 흙 묻힐 마음이 돼 있느냐는 것"이라고 한다.

어려서 집안 농사일을 도운 윤 지점장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은행에 취직하면서 농사와는 한동안 거리를 뒀다. 그러다 1995년 차장으로 승진해 고향인 이천지점에 발령받아 1년 반 가량 근무하며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서울집과 고향집에서 절반씩 출퇴근하며 논밭 일을 했다. 96년 7월 이천지점을 떠난 후에도 지금까지 별일이 없으면 주말에는 고향집으로 향한다. 모내기나 파종과 같이 큰일은 윤씨의 몫이다. 매일 신경을 써야 하는 잔일은 아버지(90)와 어머니(86)가 거든다.

그는 "농사로 큰돈 벌지는 못하겠지만 내 인건비 정도는 나올 것"이라며 "부모님 곁에 살면서 자연 속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고 말했다. 그의 논에서한 해 생산되는 쌀은 120가마 정도니 가마당 약 20만원으로 계산하면 한 해 수입은 2400만원 정도라고 했다. 밭에는 고추.옥수수 등을 심는다. 부인도 주말에 함께 이천에 간다. 대학생인 아들(25)과 딸(22)은 가끔 따라가는 정도.

윤씨는 요즘 부인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한다. 부인과 함께하는 성당 봉사활동 참여 횟수를 늘린 것도 그런 이유다. "퇴직 후 외롭지 않으려면 친구가 많아야 하는데 집 사람이 가장 가까운 친구 아니냐." 고향 초등학교 동창회 총무를 맡는 등 각종 모임에도 열심이다.

물론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은행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은행 일로 정신없이 바쁘다. 아침 8시 출근해 직원조회에 예금유치, 대출상품 판매까지 각종 업무를 처리하면 하루가 금방 간다. 일이 몰리면 주말에 이천에 가지 못할 때도 있다. 그는 농사를 은행 일과 연결하는 묘안을 짜냈다. 자신이 농사지은 쌀을 우수고객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다. 윤씨는 "똑같은 10만원짜리 선물이라도 갈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번 듣지만 쌀은 열 번 가까이 듣는다"고 했다. "농촌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고객이 많아 농사 이야기를 하면 반응도 좋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주변에서는 '쌀 지점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윤씨가 은행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5년 정도 남았다. 그는 "앞으로 승진해 더 중요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자문역이 돼 '뒷방'으로 물러날 수도 있지만 내 젊음을 바친 곳이니 있는 날까지 열심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그의 주말 이천행은 계속될 것이다. 윤 지점장에게는 노후에 대비한 준비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아직은 밝히기를 주저했다. 일과 노후 준비를 함께하는 윤씨의 모습이 넉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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