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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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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어디에 눈을 둬야 할까요. 하늘도, 바다도, 그 사이 놓인 흰 캔버스도 텅 비어 있습니다. 무엇을 봐야 할까요. 갯벌 위 흰 천의 고요함이 파도 소리도 흡수해버릴 것 같습니다. 이명호(44)의 사진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Nothing But)’ 시리즈 중 한 점입니다.

이명호, 'Nothing But #2', 2018. [사진 갤러리현대]

이명호, 'Nothing But #2', 2018. [사진 갤러리현대]

이명호는 ‘나무(Tree)’ 시리즈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나무 뒤에 대형 캔버스를 설치하고 사진을 찍는데, 평범한 나무에 흰 배경이 생기니 특별해졌습니다. 숲에 있는 여러 나무 중 한 그루가 아니라, 주인공이 됐습니다. 캔버스를 설치하기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진 겁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이명호, Tree... #9, 2017. [사진 갤러리현대]

이명호, Tree... #9, 2017. [사진 갤러리현대]

15년째 해 오는 이 작업을 이명호는 ‘예술-행위 프로젝트’라고 부릅니다. 풍경에 흰 캔버스를 설치하는 행위를 통해 예술의 역할과 본질을 환기시킨다는 취지입니다. 프로젝트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사막 저 너머에 대형 캔버스를 깔기도, 갯벌에 빈 캔버스를 세우기도 합니다. 이제 캔버스 앞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그루 나무같은 무언가를 부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흰 천이 스스로 빛납니다. 드넓은 풍경 안에 펼쳐진 캔버스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고달픈 현실을 희망의 순간으로 바꾸는 것은 결국 그런 사소한 무언가일 겁니다.

풍경에 세우는 빈 캔버스는 뭔가를 가리는 역할도 합니다. 이 갯벌 위 캔버스 뒤에는 바위가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일부러 대상을 지워봤다”며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품고 있다”고 작가는 설명합니다. 풍경을 찍되 풍경을 지웁니다. 보이는 것만 찍는 줄 알았는데 사진이 감히, 보이지 않는 뭔가를 담으려고 합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꼭 채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겁니다. 그저 그대로 있기만 해도 장한 것들도 많죠. 새해도 이제 보름이 지났습니다. 결심은 점점 희미해지고, 몸은 슬슬 예전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작심삼일, 그래도 아직은 채워나갈 여지가 많겠죠. 그러나 문득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저렇게 비워둬도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